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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5-11 08:17
<협상의 기술>과 근로조건 대등결정의 원칙
 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79  
* 이 글은 JTBC 드라마 <협상의 기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협상은 생활이고 삶이고 전쟁이고 역사다.” 드라마 <협상의 기술>은 대기업 M&A팀의 활약상을 담은 드라마다. 드라마는 극 초반 일종의 오리엔테이션 격으로 “M&A는 말 그대로 전쟁입니다. 최근에 큰 전쟁이 없는 게 M&A가 있어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전쟁이 무기로 싸운다면 M&A는 계약서로 싸우는 겁니다”라는 M&A 전문가 윤주노(배우 이제훈)의 대사를 앞세워 드라마가 그리는 세계가 수트라는 전투복을 입고 서류로 싸우는 현대판 전장임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총칼이 아닌 계약서로 하는 현대판 전쟁은 무엇일까. 가령 작품 속 최고 악역으로 등장하는 하태수 전무(배우 장현성)는 소규모 게_임회사를 인수하기 위한 계약에서 상대방의 의자 키높이를 낮춰 자신을 올려다보게 하는가 하면, 계약서 출력물을 미리 뽑아놓아 서명을 재촉하고, 굿캅-배드캅 역할로 다시 계약서 서명 날인을 압박하는 식의 통속적 기술을 시전하며 억지 계약을 성사시킨다.

반면 M&A 팀장 윤주노는 상대방이 여러 사정상 드러내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한없는 경청이다. 이렇게 성사된 계약은 하태수 전무의 그것과 달리 예후가 좋고 오래간다. 결국 드라마는 윤주노의 반대편에 서 있는 하태수의 조악한 잡기술과 밀실 조직정치 따위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적절히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이 전쟁을 풀어가는 열쇠임을 강변한다.

물론 이런 주제 의식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의 감독 안판석이 전작 <졸업>에서 살벌한 대치동 입시교육 현장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국어 학원강사의 이야기를 그렸던 것에 비춰, <협상의 기술>이 <졸업>의 대기업 버전이라는 세평도 나온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다만 노동법을 다루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협상의 기술> 속 주인공이 자본력에서 월등히 약자인 계약상대방을 대등한 당사자로 시종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모습만으로도 이 작품이 반갑고 귀하게 다가왔다.

앞서 언급한 하태수 전무의 잡기술은 사실 근로계약이 이뤄지는 현장에서는 보편화된 모습이다. 다른 계약들처럼 계약서 안을 가지고 양 당사자가 최종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수정안을 주고받고 협상하는 모습은 근로계약 현장에서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근로기준법 4조가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라고 천명하고 있음에도, 현장에서 근로계약은 명확한 갑을관계 하에서 갑이 법률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날카롭게 세팅해둔 근로계약서에 을이 서명 날인만 하는 방식으로 체결된다.

이렇듯 드라마 속 ‘서류 전쟁’은 현실의 노동자들에게 요원하기만 하다. 드라마는 현대의 전쟁은 계약서로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계약서에 오직 서명만 해야 하고 원하는 조건을 요구할 수 없다면, 아니 근로계약서를 교부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이면 드라마 속 ‘협상의 기술’은 모두 딴 세상 이야기다.

드라마는 복수극이란 장르에 걸맞게 윤주노가 메인 빌런 하태수에게 최종 승리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썩 괜찮은 갑이 을들을 대등한 상대방으로 배려하고 마침내 가장 나쁜 갑을 무찌르는 줄거리는 통쾌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노동자들의 근로계약 현장에 윤주노 같은 사장은 존재하지 않고, 노동자 일개인이 윤주노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 현실의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건 결국 ‘협상의 기술’이 아니라 단결한 노동자들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힘’이다.

조영훈 공인노무사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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