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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5-12 07:53
주류가 너무 띨띨하다
 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84  
와장창! 집안이든 어디에서든 저마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뭔가 떨어져 깨지면 이목이 확 집중된다. 이처럼 평소에 그럴싸한 것들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뭐가 떨어지고 깨져서 관심을 끄는 ‘와장창 정치’를 체험하는 것이 요즘 대한민국이다.

돌이켜 보자. 지난해 12월3일 느닷없는 계엄, 12월7일 국회 탄핵 부결, 14일 탄핵 가결, 12월31일 대통령 체포영장 발부, 1월15일 윤석열 체포, 3월8일 구속취소, 4월4일 헌재 파면 결정, 5월1일 대법원의 이재명 유죄 취지 파기환송, 5월7일 고등법원이 재판 연기, 그리고 김문수와 한덕수가 얽힌 ‘난리 부르스’까지 봤다.

이런 와장창 정치는 온라인에서 주목받으려는 관심종자의 자극적 행동과 비교할 수 없는 국가적 난리다. “성찰 같은 소리하네.” 그렇다. 지금은 선거를 통해 (권력)투쟁을 할 때다. 뼈아프게 자신을 돌아보는 것보다 남을 비난하는 것이 늘 쉽다. 특히 선거는 성찰보다 상대를 비난하는 공간이다. 설혹 나중에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릴지라도.

​폭증한 정치 인플레이션

설이나 추석에 소비가 늘어나듯 선거철이면 정치 소비도 늘어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대목이 아니다. 느닷없는 탄핵이 만든 특수 상황이다. 정치적 이슈의 공급 과잉으로 인해 정치 소비가 늘어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조율하는 예술로서 정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런 일들은 없었을 것이다. 불량품 공급은 있지만 정품 공급은 적어서 제대로 된 정치를 바라는 수요가 상대적으로 많아서 생긴 정치 인플레이션이다.

단지 정치 영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복합위기의 시대에 과거와 같은 경로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배경이 있다. 무엇보다 디지털 세계는 오프라인까지 극단화로 치닫게 하는 경로 이탈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밥이나 빵보다 ‘밈’을 더 열정적으로 소비한다. 그것도 그냥 밈이 아닌 극단화된 밈들이 가득하다.

‘고관여층’ ‘열정적 참여층’ 등 좋은 이름을 붙여 정치에 적극적인 사람들을 칭송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긍정적으로 작동했다면 와장창 정치가 등장했을까. 다양한 이견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드러냄으로써 공론장에서 활발한 토론과 숙의를 통해 합의를 이루면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으로 갈려 상대를 “싹쓸어 버려”라거나 “빨갱이는 죽여도 괜찮아” 식으로 정치 참여는 극단화됐다. 성숙과 거리가 먼 참여가 퇴행적 ‘와장창 정치’의 양분이 됐다.

띨띨 시상식을 한다면

국민의힘이 정당정치의 붕괴를 극적으로 드러냈다. 밖에서 데려온 대통령이 계엄을 일으키고 밖에서 후보를 데려오기 위해서 새벽에 후보를 바꿔 치기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내 경선을 통해 뽑은 대통령 후보를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으로 바꾸려는 것은 정당이 민주적 제도라기보다는 권력투쟁의 하찮은 도구란 점을 보여준다.

“국민의힘에는 국민이 없고, 민주당에는 민주가 없으며, 조국혁신당에는 조국이 없다”는 얘기를 되새겨봐야 한다. 국민의힘이 조롱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진보정당까지도 ‘위선정당’이라고 부르는 위성정당을 만들었다가 쉽게 부수는 일을 해왔다. 정치권을 주름잡는 이들 중에서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별로 없다. 이렇게 말하면 “국민의힘을 공격하지 왜 물타기하냐”는 반론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띨띨하다’는 표현은 비속어지만 ‘영리하지 않고 멍청하고 어리석다’는 우리말이다. 둔하다고 어리석다는 ‘띨빵’하다는 표현도 있다. ‘와장창 정치’를 보여주면서 띨띨함을 유감없이 드러낸 ‘띨띨 대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단연코 윤석열이다. 그러나 대상 하나만 주는 시상식이 없듯이 그와 함께 띨띨한 금상, 은상, 동상, 장려상을 받아야 할 주류 엘리트들이 적지 않다.

엘리트를 위한 변명

“세포가 사멸 주기를 무시하고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인체의 기능을 망가뜨리는 질병.” 이것은 암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다. 인간의 몸은 계속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을 멈추고 성숙으로 나가야 할 때 성장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암세포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세포라면 사멸하면서 새로운 세포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

왜 서울대, 법대,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이라는 엘리트들이 이렇게 띨띨할까. 세월이 하도 빨리 변해서 그들이 자라던 시대와 다른 세상인데 여전히 자신들이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좀 더 구조적으로 들어가면 다중위기라는 복잡해진 문제를 풀 방법을 정확히 찾지 못해서 엉뚱하게 헤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순진하게 엘리트의 선의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들이 시민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하려고 하는데, 시민이 띨빵해서 그들도 덩달아 띨띨해 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엘리트의 띨띨함을 변명하기 위해 결국 시민을 띨빵한 존재로 만드는 엉뚱한 결론이지만.

욕망의 포로가 똘똘할 수 있을까. 이익 욕망이 가득한 사람이 돈 버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비리에 빠져들어 청문회에서 까발려지고 사법처리까지 가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권력 욕망이 충만한 사람은 권력투쟁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공화국이 의미하는 ‘모두를 위한 권력’이 아닌 자신을 위한 권력에 빠져 탄핵당하고 감옥까지 가는 일이 벌어진다. 보통 시민이야 기를 쓰고 세습해줄 것도 없지만, 기득권을 물려주려는 세속자본주의에서 자녀에게 재산이나 학력을 물려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비리도 만만치 않다. 주류라면 최소한 이 체제를 책임지려는 소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 가족, 파벌, 진영의 욕망에 갇힐 때, 똘똘함은 사라지고 띨띨함만 남는다.

가볍게 투표, 질기게 운동

사회운동, 특히 계급운동이 강력할 때, 주류는 띨빵해질 여유가 없다. 빨간 쪽 주류든 파란 쪽 주류든 제들끼리 싸우다간 체제가 박살 나 주류의 위치에서 통째로 축출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어떻게든 타협하면서 체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류를 흔들 강력한 운동의 부재는 그들의 태만을 낳고, 게으른 그들은 자기 욕망의 포로가 돼 ‘와장창 정치’로 띨띨함을 드러낸다.

정치 인플레이션이 폭증한 지금, 사회운동은 대체로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는 제도로 파고드는 것이고 둘째는 독립적인 자기 길을 열기 위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독자적 정당을 만들어 직접 후보를 내거나, 유력한 정당을 지지하거나 일부가 들어가는 방식으로 그들의 우산을 쓰는 것이나, 정당에 정책을 제안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책 연합을 하는 것이다. 후자의 길은 시민사회운동에 우호적인 사람이 당선되는 것을 기회삼아 사회운동을 확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7년 6월 항쟁 직후,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노조가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의 길은 사회운동에 대한 독자적 전략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운동은 공백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 노동시장의 기성노조의 사회운동적 활력은 높지 않고 플랫폼노동자·프리랜서 등 새로 형성된 노동시장은 사각지대로 남겨진 상태인데, 노동운동은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다가 민주당에 간 사람들, 민주당을 지지한 진보당, 민주노동당의 독자후보 등으로 정치에 종속적 모습이 강하다. 시민단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장에 종속된 사회를 보여주었다면, 다중위기 속에 있는 지금은 정치에 종속적인 모습이 강하다. 정치적 지향이 강한 분들은 선거에 몰입해야겠지만, 똘똘한 엘리트가 ‘뿅’하고 나타날 리 없다. 독립적 사회운동 전략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볍게 투표하고 질기게 운동’할 것이다.

조건준 아무나 유니온 대표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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