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5-12 07:54
영화숙·재생원, 지옥에서 돌아오거나 오지 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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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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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이전에 영화숙·재생원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부산지역 최대의 집단 수용시설로 인권유린이 일어난 영화숙과 재생원을 아시는가. 눈물 없이는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지난 2월25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손석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를 비롯한 181명이 국가로부터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했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와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후 정부와 부산시는 부랑아 보호와 근절이라는 미명 아래 끔찍한 인권침해를 자행하였다.
정부는 부랑아를 도시 치안을 악화시키는 존재로 취급하며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부랑아 보호책 실시요령’ ‘부랑아 보호 기간 실시요령“을 발령했다. 부랑아를 ‘일정한 주거 없이 제처(여러 곳)를 방황하고 걸식 또는 구걸을 상습으로 하는 아동’으로 정의했다. 전국에 산재하는 부랑아를 행정당국과 중앙 및 지방의 관계기관이 긴밀히 협조해 ‘발본색원’하도록 했다. 매주 1회 아동 ‘수집’을 강행해 연고자 유무를 감별한 후 무연고 아동을 아동보호시설에 강제수용하도록 정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2년 아동복리법, 생활보호법을 제정·시행해 부랑아, 부랑자의 수용을 위탁할 민간 복지시설에 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사회악 제거, 사회 명랑화, 질서 유지 명목의 부랑아 단속과 시설수용이라는 정부 정책을 이전보다 강화했다.
그 무렵 재단법인 영화숙은 부산 서구 장림동에 소재한 수용 인원 26명의 소규모 아동 수용시설이었다. 부산시는 1962년 장림동 영화숙 부지 내에 노숙자 수용소를 짓고 영화숙에 그 운영을 위탁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렇게 18세 미만 부랑아를 수용하는 영화숙, 18세 이상 부랑인을 수용하는 재생원은 부산 지역 최대 집단 수용시설로 성장했다. 이후 부산시는 1968년 ‘부산시재생원설치조례’를 만들어 사후적으로 부랑아, 노숙자 등을 강제수용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하지만 아동복리법, 생활보호법, 부산시재생원설치조례, 그외 치안 관계 법령 어디에도 부랑자라고 해 영장 없이 체포·구속할 정당한 법적 근거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경찰이나 관련 공무원도 아닌 영화숙·재생원의 단원 등 민간인에 의해 단속과 수용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민간 단속반은 경찰의 협조 없이 단독으로 활동했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피해자 181명 중 133명이 민간 단속반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단속됐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강압적으로 끌려갔는데, 181명 중 130명이 연고자가 있었다고 조사됐다. 심지어 부모가 수용된 아이를 찾으러 왔는데도, 영화숙·재생원은 해당 아동이 없다며 부모를 돌려보냈다. 아동복리법령상 시장 등이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수용의뢰서를 작성한 경우에만 보호 수용할 수 있었지만, 영화숙·재생원에 그런 자료는 전무하다.
재생원의 성인들과 영화숙의 10세 초중반 아동은 낙동강 하천 부지 개간 작업, 영화숙 부지 내 대운동장 조성 작업, 축사 및 농장 작업 등에 강제로 동원돼 노역을 했다. 강제 노역에 동원되지 않는 아동들은 호실 내에서 정자세로 대기해야 했다. 군대식 편제와 규율로 통제·관리되며, 아무런 이유 없이 중간관리자에 의한 폭력과 가혹행위가 반복됐다. 폭행으로 많은 사람이 장애를 입었다. 부산시로부터 받는 식비 등 보조금은 소년원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운영진은 이마저도 횡령했다. 원생들은 축사에서 돼지 먹이용 음식물 쓰레기를 훔쳐먹거나 소나무 껍질을 뜯어 먹었다. 약 3~4평 크기 방에 평균 15~30명, 많을 때는 50명까지 수용돼 지그재그식 칼잠을 자야 했다. 운영진, 소대장, 반장 등 중간관리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원생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구타, 가혹행위, 질병으로 사망한 원생은 뒷산에 암매장됐는데, 사망자 처리는 하지 않아 정부로부터 받는 보조금 지원은 유지됐다. 도망가다 걸리면 다시 죽을 만큼 맞았다. 생지옥이었다.
가톨릭계의 구명운동 등으로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되자, 부산시가 1971년 영화숙과 위탁계약을 해지했다. 하지만 부산시는 이후 칠성원, 형제복지원과 똑같은 위탁계약을 맺었고, 덕성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 ‘기한 없는 강제수용’의 희생자를 만들었다. 비단 부산지역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52년이 지난 2023년 8월에야 과거사위는 영화숙·재생원 사건의 조사를 개시했다. 과거사위는 지옥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 신평동 야산에 묻힌 사람들의 유해를 발굴해야 한다는 권고를 정부에 했다.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이 무지막지한 국가폭력으로부터 입은 피해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시작한다. 반성하지 않은, 그리고 규명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상규 변호사(법률사무소 시대)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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