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5-26 07:43
이란 히잡 혁명의 본질을 알려 주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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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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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히잡 혁명을 다룬 이란의 극영화다. 이란 정부의 탄압을 받는 모하메드 라술로프 감독이 검열과 억압을 피해 비밀리에 만든 작품이다. 202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으며, 칸 영화제 기간에 감독이 유럽으로 망명해 화제가 됐다.
한국에서는 2024년 부산 영화제에서 상영했으며, 다음달 3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히잡 혁명이라는 사건을 겪는 한 가족의 갈등을 그림으로써, 국가권력과 가부장제의 균열을 완전히 포개 놓는다. 영화는 3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을 통해 스릴러적 긴장을 보여주다가 명확한 결말에 이르는데, 이를 통해 감독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1. 가족, 국가의 축소판
모하메드 라술로프 감독은 이란의 거장으로, 2017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집념의 남자>로 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란 정부는 감독의 여권을 압수했다. 2020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사탄은 없다>로 황금곰상을 받았지만, 영화제 참석이 금지됐다. 2022년에는 반정부 선동 혐의로 징역형을 살다가 나왔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비밀리에 이란·프랑스·독일이 합작해 만든 영화다. 완성을 앞두고 이란 정부가 감독에게 징역 8년형, 재산몰수형, 벌금, 태형 등을 선고했다. 여배우들에게 히잡을 씌우지 않았고, 국가안보에 반하는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했다는 혐의였다. 결국 감독은 이란을 탈출해 칸 영화제에 작품을 선보이고, 망명길에 올랐다.
영화는 히잡 혁명의 본질을 정면으로 다루며, 이란 정부를 정조준하고 있다. 히잡 혁명이 무엇에 반대하며, 그것을 둘러싼 갈등의 양태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에는 히잡 혁명의 실제 장면이 다큐멘터리처럼 삽입돼 있다. 물론 그런 장면도 충격이지만, 더 큰 충격은 극영화에 있다. 심리 스릴러적 긴장감이 상당하다. 영화는 가족극을 표방한다. 가정 안에서 가장이 아내와 딸을 억압하고 가부장제의 권위가 무너지는 모습은, 신정국가 이란이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자국민을 폭력으로 통치하는 기전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 한 가정이 있다. 아버지 이만은 독실한 무슬림 변호사로, 최근 테헤란 혁명수비대 법원의 수사판사에 임명됐다. 아내 나즈메는 남편이 일생 성실하게 살아와, 드디어 꿈꾸던 판사에 임용됐다며, 집도 늘려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부부의 두 딸, 레즈번과 사나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히잡 혁명을 접하지만 적극적인 관심은 없었다. 오히려 이사 갈 새 아파트에 기대가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딸들과 함께 등교시켜 주던 딸 친구가 학교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얼굴을 심하게 다치는 일이 벌어진다. 딸들은 다친 친구를 집에 데려와 응급처치해 준다. 엄마는 남편이 공직자라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딸의 친구를 응급처치하고 집에 숨겨 준 것을 묵인해 준다. 하지만 거기까지라고 선을 긋고, 더는 연루되지 말라며 딸들을 단속한다. 엄마는 딸들이 위험한 시위에 나가지 않도록 보호하고, 공무원인 남편의 신변에도 위해가 미치지 않도록 해 가정을 온전히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권위도 지켜주면서 가정을 잘 다독이고 싶다. 그런데 사태는 그리 간단하게 봉합되지 않는다.
2. 총을 잃고 미쳐 가는 아버지
일단 이만이 맡은 수사판사 업무라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반정부 시위에 관한 범죄행위를 조사하는 업무다. 법률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권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자가 필요한 자리였다. 사형 선고를 포함해 상부에서 내린 판결을 거스르지 않는 인물이 필요한데, 이만의 전임자는 그걸 거부해서 해고된 거란다. 그러니까 한국의 군부독재 시절에 공안검사나 판사, 또는 안기부 직원처럼 독재에 적극적으로 부역할 자리인 셈이다. 이만이 임용된 뒤에 상급자는 이만을 부르더니, 반정부 세력들에게 신상이 노출되면 안 되니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보안을 유지하라며, 소셜미디어를 못하게 하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리고는 혹시나 누군가 공격하면 호신용으로 쓰라며 권총을 지급한다. 이만은 권총을 집에 가져왔다가 그만 잃어버린다.
집안에서 총을 잃어버린 이만은 가족 모두가 의심스럽다. 아내, 큰딸, 작은딸, 누가 총을 가져갔는가. 아무도 모른다니,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딸이나 아내가 불온한 사상에 물들지는 않았는지 검열하게 된다. 영화에서 총은 상징적인 물건이다. 애초에 왜 총이 필요했는가. 공무원이 얼마나 국민에게 적대적이고 불신받는 존재이면 총이 있어야 자기방어가 될까. 이것 자체가 폭력으로만 방어가 가능한 국가와 종교의 권위를 상징한다. 또한 이만은 총이 없어지면 직장에서 ‘그것 하나 간수 못 한’ 무능한 인간으로 찍힌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한다. 즉 자신이 외부에서 겪는 취약한 입지를 가리기 위해, 아버지는 가족에게 무리하고 강압적으로 행동한다.
시위가 전국으로 격화되자 이만은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사형 선고에 서명해야 한다. 처음엔 국가를 위한 일이겠거니 시작했지만 손에 피를 묻힐수록, 누군가 쳐다보는 눈빛만으로도 두렵다. 이만의 삶은 점점 불신과 편집증으로 가득 차고, 성격이 폭력적으로 변한다. 급기야 자신의 가족을 비밀 수사관인 친구에게 넘겨서 눈을 가리고 심문을 받게 한다. 소셜미디어에 이만의 신상이 털리자, 이만은 가족을 납치하듯 데리고 산속 집으로 도피한다. 산속 집에서 이만은 가족을 감금하고 재판하듯 캠코더를 켜놓고 자백을 강요한다. 이 모든 행위가 가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행된다. 히잡 혁명을 탄압하는 이란의 국가적·종교적 권력도 국민을 보살핀다는 부권적 권력을 참칭한다. 이란 정부는 국가에 복종하지 않는 국민의 (특히 여성들의)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고 학살한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구체제를 상징한다. 그도 처음부터 폭력적인 아버지는 아니었다. 나름 다정하고 책임감 있고 딸들을 사랑하는 가부장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권위가 훼손됐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미쳐간다. 그는 억압자이자 더 큰 국가체제의 희생자이기도 한데, 그런 존재는 새로운 세대에 의해 ‘땅속으로 꺼져서 파묻혀야’ 한다는 것을 영화의 결말을 통해 잘 보여준다. 딸들은 새로운 세대를 상징한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고, 친구의 아픔에 연대하며, 불의한 체제에 맞선다. 언니가 엄마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어 거짓 자백을 하고, 동생이 기지를 발휘해 엄마와 언니를 구출하는 모습은 새로운 세대의 희망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내란의 어둠을 딛고 ‘빛의 혁명’을 이끈 것은 2030 여성들이었다. 이들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돼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개봉일이 마침 대선일인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세계는 연결돼 있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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