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5-26 07:43
저성장·고성숙 커플을 만들 사회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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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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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탁자 위에 몇 개의 컵을 뒤집어 놓고 그중에 지정된 물건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컵 앞에 돈을 놓는다. 맞추면 돈을 먹고 틀리면 돈을 잃는다. 게_임이라기보다는 도_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벌이는 야바위꾼은 “돈 놓고 돈 먹기”라며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자본주의를 이런 야바위에 비유한다면 지나칠 것이다. 야바위와 달리 투자는 생산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고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신념으로 굴러가는 세상을 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투기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주식시장이든 가상화폐 투자든 돈 놓고 돈 먹기와 무척 닮았다.
자본은 운동한다. 자기 증식을 위해 운동한다. 돈을 놓고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은 화폐가 돼 투자되고 건물, 기계설비, 원재료를 비롯한 생산수단으로 변하고 이를 이윤을 만들기 위해 결합하고 소비해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이 다양한 모습의 자본은 이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인다. 자본은 스스로 키우는 자기 증식을 위해 운동한다. 이건 상식이지만, 험하게 요약하면 자본은 ‘돈 넣고 돈 먹기’ 위해 운동한다.
노동은 다르게 운동한다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노동하지만, 단지 노동에 멈추는 것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운동을 한다. 그것이 노동운동이다. 노동자는 무엇을 위해 운동할까. 여러 측면이 있지만, 자본운동에 대비해 본다면 줄이기 위해 운동한다. 노동은 자본처럼 자기 증식을 위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기를 줄이기 위해 운동한다.
세계노동절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에서 시작됐다. 세계 노동자들은 권리 향상을 위해 임금인상도 하고 복지도 늘리지만, 그 핵심에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가 있다. 노동시간을 줄여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운동이다. 자본이 자신을 증식하려 운동한다면, 노동은 자신을 줄이려 운동한다. 자본에게 살 길은 자본을 늘리는 것이라면, 노동이 노동을 늘리는 것은 장시간 노동으로 죽는 길이다.
자본이 운동하는 명분은 경제적 성장이다.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운동하지만, ‘너희 모두의 부를 늘리기 위해 우리가 움직인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그럼 노동이 운동하는 명분은 무엇인가. 사회적 성숙이다. 돈을 위한 성장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연을 수탈하고 기후를 파괴하는 일을 동반해왔다. 그래서 착취와 차별을 없애고, 자연에 대한 수탈에 반대하고, 기후정의를 외치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성숙을 향한 것이다.
자본과 노동이 얽힌 사회지능
줄이려는 노동과 늘리려는 자본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크게 보면 둘 사이는 화해할 수 없어 적대적으로 싸워야 할 운명이라는 계급투쟁 이론, 정반대로 노동과 자본이 사이좋게 결합해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든다는 노자일체론, 노동과 자본은 생산을 위해 결합하지만 서로 달라 갈등하는 이중적 관계로 보는 의견이 있다.
동양에서는 음양이 뒤섞여 우주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음양의 철학은 흑과 백의 딱 두 가지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음양이 역동적으로 엮여서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다양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0과 1로 이뤄진 비트가 컴퓨터를 낳고 그것에서 인터넷이 탄생하고 사이버 세계라는 엄청난 다양성을 만들었다. 온라인 세계는 단지 0과 1로 환원할 수 없는 우주를 만든 것이다.
이처럼 늘리려는 자본과 줄이려는 노동이 부딪치고 뒤섞이면서 다양한 세계를 만든다. 두 계급이 뒤섞이면서 정도에 따라서 노동자에 가까울 수도 있고 자본가에 근접할 수 있는 다양한 중간계급이 탄생한다. 두 계급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정도에 따라서 혁명을 통한 노동자 국가가 탄생하기도 했고, 치열한 갈등 끝에 복지국가라는 체제로 타협하기도 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국을 수탈하는 제국주의가 생기기도 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열풍이 강해질수록 중요한 것은 사회지능(Social Intelligence, SI)이다. 노동과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에 따라서 사회지능이 달라진다. 자본이 노동을 압도할 때 시민의 압도적 다수인 노동자의 노동권은 짓눌려 시민권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사회지능이 형편없이 낮은 것이다. 노동과 자본이 균형을 이룰 때 복지국가와 같은 수준 높은 체제를 만들었다. 높은 사회지능을 보여준다.
고성장·저성숙 커플은 갔다
과거 같은 고도성장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인공지능 개발에 열을 올리는 대표적인 기술 권력인 일론 머스크는 인간처럼 춤추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면서 "기본 고소득" 사회가 올 것이라고 했다. 기술권력이 지배할 때 세상이 로봇 천지가 돼 모든 시민이 고소득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뻥이다. 한국경제개발원(KDI)은 2040년에 0% 성장할 것이라는 장기전망을 내놓더니 올 경제 성장을 0%대로 예측했다. KDI의 전망을 ‘대통령 후보들에게 성장에 신경 좀 쓰라’는 성장중독증 자극으로 해석하는 언론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저성장 시대에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보다 사회지능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사회지능이 얼마나 낙후한 것인지 보여준 사건이 12·3 내란사태다. 무려 45년 전에나 있었던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은 우리 사회를 통째로 후퇴시켰다. 찬탄(핵)과 반탄, 민주와 반민주라는 낡은 구도로 우리를 퇴행시켰고 이것은 한국의 사회지능의 퇴행이다. 저성장 시대에 간절한 것은 고성숙이다. 저성장과 고성숙이 만나게 하는 것이 높은 사회지능이다. 그런데 현실은 저성숙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 4일 근무제를 향한 주 4.5일제와 같은 공약이 나온다. 이것은 줄이려 운동하는 것에 가깝다. 물론 독립노동의 시간은 이런 방식으로 주당 며칠이나 주당 몇 시간으로 못 박는 제도로 규제되지 않기에 새로운 노동시장에 부합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게다가 늘리려는 자본의 이해를 담아 주 4.5일을 하되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 규제를 풀어 결국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얄팍한 시도도 있다. 이것은 과거의 고도성장기에나 통했던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자본을 증식하려는 사고다. 사회지능이 아닌 ‘사회저능’이다.
기후위기를 생각할 때도 노동시간은 줄여야 한다. 인구축소를 생각해도 노동시간을 줄이고 돌봄과 휴식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특정 기업과 공장의 형태를 이룬 고체적 노동과 다른 고용관계 없는 유체적 독립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법까지 논의할 사회지능이 필요하다.
복합위기 시대를 넘어설 사회지능은 욕망을 재배치할 것이다. 성장중독에 걸린 경제는 성장이 안되면 분배와 같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할 것이고, 성장기를 산 아버지처럼 가장 역할을 하려다가 박탈감에 빠진 젊은 남성은 억압된 욕망을 왜곡된 혐오와 적대로 표출할 가능성이 크다. 디지털 세계가 부추긴 고립, 불안, 편향에 대한 통찰도 필요하다. 자본가에게 자본증식을 그만두라면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정치가에게 권력 욕망을 버리라는 것은 헛소리일 것이다. 시대를 반영하는 시민 주체의 등장과 그 물결이 욕망을 재배치하는 힘이다. 계엄을 막고 탄핵을 이룬 것은 퇴행을 막는 수준이지 미래를 설계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에게 더 나아간 사회지능이 필요하다.
조건준 아유 대표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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