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내란사태 이후 열린 광장에서 시민들은 ‘우리’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윤석열’보다도 많았다. 1천700여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인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시민발언 연구팀에 소속된 박상은 플랫폼C 활동가가 지난해 12월18일부터 올해 4월4일까지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발언 1천233건을 분석한 결과다. 키워드 빈도를 분석했을 때 ‘우리’ ‘윤석열’ ‘탄핵·퇴진·파면’ 순으로 나타났다.
박 활동가는 “남태령 집회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광장식 자기소개’가 많아졌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하고, (다양한 ‘나’들이 모여) ‘우리’가 지금 광장에 함께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광장에서 ‘우리’의 범위를 넓혔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광장에서 확대된 ‘우리’의 범위가 6·3 대선을 앞두고 유력 대선후보들의 공약과 말을 통해 다시금 좁아지는 모양새다. 특히 보편적 평등권 보장을 위한 기본법, 차별금지법 제정 관련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한 대선후보는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유일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민주당의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12·3 내란사태 이후 시민들이 가장 바라는 사회개혁은 차별금지와 인권 보장으로 조사됐다.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온라인 자유발언대 ‘천만의 연결’에 올해 2월10일부터 3월6일까지 수집된 시민 의견 651건을 분석한 결과 ‘차별금지와 인권 보장’이 31%로 가장 많았다.
윤석열 퇴진 광장이 열리기 이전에도 차별금지법에 대한 여론은 찬성쪽에 기울어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2022년 4월26~27일 전국 만 18세 이상 1천3명을 대상으로 ‘평등에 관한 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는 평등사회 실현을 위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67.2%가 ‘동의한다’(매우 동의 41.3%·다소 동의 25.9%)고 답했다. 갈등이나 이견을 설득하고 조정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적 합의’를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왜곡된 발언으로 공포나 혐오를 조장하는 후보들도 문제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TV조선을 통해 방송된 연설에서 “(차별금지법은) 범죄 전과자까지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며 “이 법대로라면 조두순이 초등학교 수위를 한다고 해도 막으면 차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역시 TV 토론에서 권 후보에게 “차별금지법에서 전과가 있는 사람은 기본권이 제약돼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김문수 후보와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다.
2007년 참여정부 ‘반쪽’ 법안 발의
18대·19대·21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 ‘반복’
“정치의 실패로 극우·혐오 세력 득세”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장애·나이·인종·종교·성적 지향·성별정체성·고용형태·병력 등에서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 피해자가 실질적으로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법이다. 현행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이나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 같은 차별을 금지하는 개별 법이 있지만 특정 분야와 대상에 한정된 탓에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표1 참조> 또 차별은 한 가지 속성이나 이유만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결혼이주여성은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 국적에 따른 복합적인 차별 구조 속에 놓일 수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큰 ‘우산’ 아래, 필요에 따라 개별 법을 추가·보완하는 형태가 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데 바람직한 모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몽’(활동명)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개별 법으로만 접근하면 소수이고 힘없는 사람들은 계속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데 이는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이라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고용·교육 등 인간의 삶에서 권리가 박탈당하면 삶의 유지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필수 영역 전반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차별에 방치된 사람들을 보호하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법무부 첫 발의 이후 18대·19대·21대 국회에서 꾸준히 발의됐지만 임기만료로 폐기되는 수순이 반복됐다. <표2 참조> 최초 발의안인 노무현 정부 당시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법안은 성적 지향을 포함해 7개 차별금지 사유를 삭제해 ‘누더기’ 차별금지법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요 국정과제로 설정한 정부였지만, 보수 기독교계 중심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19대 국회에서는 김한길·최원석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가 보수 기독교 단체 압력으로 법안을 철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몽 공동집행위원장은 “법안 철회는 보수 기독교계에, 성소수자에게, 사회 전체에 (이렇게 해도 된다는) 시그널을 준 것”이라며 “혐오와 극우의 메시지를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과 합의를 만드는 데 정치가 실패했고, 그 결과가 현재 극우 대중운동의 성장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근로계약 체결 무관’ 비정형 노동자 포괄
한국노총 대선 요구안에 처음 포함
“가장 많이 혜택받는 쪽은 노동자”
차별금지법 제정 무산에 보수 기독교계가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법안 내용이 ‘성소수자 차별 금지’에만 부각된 측면이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배제하거나 박탈하려는 흐름 속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와 무산이 이어진 역사를 감안하면 차별금지 사유에서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을 빠뜨릴 수 없고 핵심이 돼야 할 필요도 있다. 다만 차별금지법이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법이라는 사실이 간과돼 왔다.
박은하 공인노무사(직장갑질119)는 “한국은 남녀 임금격차나 비정규직과 정규직 격차가 크고 만연해 있는데 이러한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금지하는 법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일터 내) 현격한 차이를 만든다”고 말했다.
현행 노동관계법령보다 넓은 노동자 범위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대목이다. 21대 국회에서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서 근로자·사용자는 근로계약 체결 여부와 무관하게 사실상 지휘·감독을 받는(하는) 자로 규정됐다. 박 노무사는 “고 오요안나씨처럼 프리랜서나 가짜 3.3 노동자는 노동청 진정시 근로자성이라는 허들부터 뛰어넘어야 하는데 차별금지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지만, 소송 외에 구제 절차를 마련하는 데 첫발을 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노동계도 차별금지법이 ‘노동자를 위한 법’이라는 데 공감한다. 양대 노총 21대 대선 요구안에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포함돼 있다. 한국노총 대선 요구안에 차별금지법 제정이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광장의 요구를 반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견 없이 대선 요구안에 포함됐다”며 “차별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이 일터이기 때문에 여성이나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일 한국노총과 더불어민주당이 맺은 정책협약서에는 “정치·경제·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받지 않고 살 권리를 보장하고,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차별을 예방하고 차별 피해자의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을 추진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실현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민주노총 사회대개혁 10대 요구안에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담겼다. 이전 대선에서도 요구안에 포함됐지만 민주노총 안에서도 이를 ‘노동 문제’이자 ‘우리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노동의 영역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공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차별금지법=성소수자 차별금지법’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법 제정시 가장 혜택을 많이 받는 건 노동자들이다. 일터내 (성적) 괴롭힘을 드러내기에 유용하고 복합차별에 따른 피해도 구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동부 “신중하게 접근해야”
노동위 차별시정 제도 실효성 갸웃
“국회에 책임 전가 말고 차기 정부 책임져야”
고용노동부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20년 6월 장혜영 전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과 관련해 노동부가 낸 의견서를 보면 “성, 연령, 고용형태에 따른 고용상 차별에 대한 구제절차의 경우 최근 노동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하려 하고 있다”며 “국가인권위 구제절차가 추가될 경우 구제절차가 중복될 가능성이 있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같은 의견서에서 노동자·사용자 개념 규정에 대해서도 “현행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 사용자 개념과 다를 경우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고용상 성차별 차별시정 제도는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제도 인지도와 시정률 모두 낮은 상황이다. 직장갑질119가 올해 2월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성차별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한(549명) 응답자 중 시정제도에 대해 53.6%는 모른다고 답했다. 직장갑질119가 김주영 민주당 의원을 통해 받은 ‘시정신청 및 처리현황’을 보면 2022년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노동위원회에 접수된 170건 중 시정명령이 내려진 것은 18.2%(31건)에 불과했다. 노동부가 구제절차 중복 가능성을 우려했지만 실제 현황은 사각지대가 넓은 셈이다.
이 때문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입법부에만 맡겨 놓을 게 아니라 정부 차원의 책임과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몽 공동집행위원장은 “탄핵 이후 조기대선으로 출범하는 만큼 새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과 로드맵에 따라 국회와 실제 입법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더구나 광장의 핵심 요구였던 차별과 불평등 문제에 대한 국가적 비전과 계획을 지도자로서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169개 단체가 모인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23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차기 정부 국정과제로 요구하는 1만명 서명운동을 진행한다.
한국 정부는 유엔 자유권위원회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요청에 따라 2026년까지 차별금지법 제정 경과에 대한 중간 이행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불법계엄과 탄핵 이후 들어설 차기 정부는 국제 사회 요청과 광장의 요구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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