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5-22 08:27
[고공농성 연대시민 인터뷰]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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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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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2014년 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하자 기자·활동가가 모여 2015년 1월 만든 굴뚝신문이 10년 만에 부활했다. 한국옵티칼 해고노동자 고공농성 500일을 맞는 21일 4호가 발행한다. 2015년 2월에 신문 2호가, 같은해 7월에는 스타케미칼 고공농성 400일을 기념해 3호가 발행됐다. 4호 제작에 손을 보탠 <매일노동뉴스>가 굴뚝신문 기사를 전재한다.<편집자>
(중략)
그때 말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중략)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중략)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중 ‘흩어져 있던 사람들’)
시 속 사람들은 ‘선생님 집’안에 흩어져 있었다. 갑자기 집으로 날아든 말벌을 계기로 비로소 모였다. 말벌이 만든 느슨한 연대를 보며 선생님은 묻는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냐고.
시 바깥에도 말벌이 있다. 고공농성장과 투쟁현장에서 연대하는 시민 ‘말벌동지’다. 한 방송에서 말벌만 보면 달려드는 말벌아저씨가 조명됐다. 이후 연대가 필요하면 어디든 찾는 이들을 ‘말벌동지’로 부르게 됐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12·13일 4명의 말벌동지와 대면·전화로 인터뷰했다. 이들은 고공농성이 반복되는 현실에 분노한다고 입을 모았다. 21일로 구미공장 고공농성 500일을 맞는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뿐 아니라 올해 2월에는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중구 호텔 인근 지하차도 안내 구조물에 올랐다. 3월부터는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이 조선소 하청노동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서울 중구 한화본사 앞 CCTV 철탑 위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장애인 탈시설을 거부하는 천주교에 항의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3명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당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해 15일 만에 땅을 밟았다.
집중적으로 연대하는 농성장은 각기 달랐지만 이들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세종호텔·한화오션 농성장, 전장연의 혜화동 성당 농성장에 모두 연대 경험이 있었다. 시 속 말벌이 그랬듯, 이들은 흩어진 투쟁현장과 시민들 사이 연대를 만들고 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을까.
광장에서 농성장까지
연대 시작점은 탄핵촉구 광장이었다. 옵티칼 연대시민 회사원 김민지(32)씨는 계엄 이후부터 줄곧 국회 앞·한강진역·남태령을 지켰다. 이전엔 집회 경험이 많지 않았다. 주변에서 다른 이이들의 경험만 듣다가 부채감에 광장에 나섰다. 친구 권유로 참여한 희망텐트·희망뚜벅이가 첫 연대였다. 매체에서만 보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공농성·해고·외투기업 문제를 알게 됐다. 차츰 옵티칼 해고노동자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뚜벅이가 끝난 지금도 농성장을 종종 찾아 조합원들과 시간을 보낸다. 구미역부터 공장 농성장까지 걷는 작은 뚜벅이를 함께 기획하는 등의 연대활동을 벌이고 있다.
세종호텔 연대시민인 김진아(35)씨는 인터뷰이 중 집회 참여 경험이 가장 많았지만 농성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탄핵 집회를 계기로 허지희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사무장을 알게돼 농성장을 찾았다.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이 고공농성을 시작하자 노동자들이 복직하는 날까지 연대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고공농성장을 보고 눈물이 계속 났어요. 지부장님은 정리해고·비정규직을 철폐하자는 과제를 안고 올라갔어요. 노동자들이 왜 생존을 걸어야 하는지 마음이 뒤엉켰어요.” 진아씨는 이전에도 세월호·박근혜 퇴진 집회 등에 나갔지만 농성장을 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노조혐오 프레임에 갇혀 노조에 거리두기를 했다. 연대와 광장을 경험하며 오히려 민주노조가 시민을 보호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농성에 연대하며 힘을 얻고, 투쟁을 알게 됐다. 삶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화오션 투쟁은 최전선 투쟁”
대학생 박수연(24)씨도 광장을 계기로 노조 주최 집회에 갔다. 올해초 ‘무지개조선소’가 시작이었다.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는 지난 2월 배 ‘연대투쟁호’를 만드는 무지개조선소 프로젝트를 연대시민과 함께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박씨는 배를 만드는 ‘잼투(재미있는 투쟁)’에 끌려 색칠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선박 건조에 참여했다. 조합원들과 안면을 익히다 김형수 지회장이 3월부터 고공농성을 시작하자 기자회견·선전전에 나섰다. 노동절 집회 때는 자연스레 지회 깃발 밑에 있었다.
왜 한화오션일까. 20대 대학생과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거리는 얼핏 멀어 보인다. 그는 한화오션 문제가 “최전선의 투쟁”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국회에서 노란봉투법이 통과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투쟁이고, 하청노동자·비정규직 철폐 같은 의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회의 투쟁이 자신의 투쟁이라고도 말했다. 수연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노동관점에서 같은 의제로 투쟁할 수 있다고 본다”며 “제가 혹여 정규직이 되더라도 하청노동자가, 비정규직이, 특수고용 노동자가 안전하지 않은 사회라면 제게도 안전하지 않은 환경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대로 넓어진 세상
연대시민들은 연대 이후 변화도 이야기했다. 김민지씨는 민주일반노조 누구나노조지회에 가입했다. 업계엔 노조가 없지만 동료들과 현장을 바꾸는 '나의 싸움'을 고민하고 있다. 박수연씨는 투쟁으로 세상을 바꾼 노동자를 보며 어떤 방식으로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김진아씨는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현장을 배우고 힘을 키워 노조나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도 한다.
대학생 이다연(26)씨는 매일 아침 눈을 떠 휴대전화로 X(옛 트위터)에 들어가 한국옵티칼 고공농성장이 위치한 경북 구미 4공단 날씨를 확인한다. 농성이 며칠 차인지도 세어 본다. 농성자들이 X에 새로 올린 글도 본다. 서울에 거주하는 다연씨는 자신의 표현대로 “마음을 쓰며” 연대를 일과에 들여왔다.
옵티칼이 가장 마음 쓰이는 이유는 농성장이 서울에 없어서다. 땅에서 답을 찾지 못한 해고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널리 알리고 보이기 위해 하늘에 오른다. “구미는 너무 조용하거든요. 일본 본사도 농성을 신경쓰지 않고. 짐작하자면, (투쟁)소식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고공농성이지 않았을까요.” 처음엔 연대가 필요하다고 해 농성장을 찾았지만 어느새 “이들의 문제가 언제든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연씨는 해고된 조합원과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고용승계를 믿는다. “(옵티칼 모기업인)니토덴코 사장을 만난다면 당신들이 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승리를 쟁취할 거라고, 꼭 이겨 낼 거라고, 공장으로 돌아가고 말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는 연대의 계기가 된 광장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탄핵을 외치던 광장은 사라졌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온 광장이 농성장과 사회에서 이어지기를 바란다. “(소수자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남태령식 자기소개라고 하면서 ‘저는 퀴어인~’으로 시작하는 발언이 중요했던 이유는 집회현장뿐 아니라 집회 밖으로 이런 문화가 확산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광장이 닫히기에는 광장 속 목소리가 너무 중요했다고 그는 말했다.
다연씨는 “연대하며 많이 환영받았고, 누구든 환영할 준비가 돼 있다”며 농성에 대한 계속된 관심과 연대를 촉구했다. 그는 희망뚜벅이로 걷는 내내 조합원·연대시민과 대화가 통하는 안도감을 누렸다. “비슷하게 운동하는 사람들, 계속 연대하고 싶어하는 고민들을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그러니 어서오시기만 하세요. 다른 건 필요없으니 일단 한 번만 나와 보세요.”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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