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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3-24 08:01
정조대왕의 작업중지권과 인간에 대한 예의
 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54  

▲ 폭염이 계속되지 화성 쌓기를 중단하라 명한 정조의 전교를 전하고 있다.
  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24장 A면. <국사편찬위원회>

봄이 왔다. 간편한 차림으로 무작정 거닐어도 좋은 날씨다. 그러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꽃향기 헤치고 임이 오기는커녕,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만 차온다. 나라꼴이 그렇다는 얘기다. 기분도 울적한데 저만치서 꾸물대는 봄이나 마중 갈까. 그런 심정으로 수원 화성(華城)에 올랐다. ‘이것은 치킨인가 갈비인가’로 유명세를 탄 통닭거리에 들러 청량감 넘치는 호프도 한잔. <무사안일> 스물여덟 번째 사연은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가 화성 축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1794년 어느 날의 이야기다.

원하는 바에 따라 부역을 정지하라

정조 18년, 청 건륭 59년.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팔달산 아래 화성을 쌓기 시작한다. 혁신도시 건설을 통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 실현이라는 정치적 포부를 달성하고자 했다.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려는 실용적 목적도 있었다.

그해 여름 조선은 불같이 달아올랐다. 유례없는 폭염이 팔도를 뒤덮었다. 화성 건설현장에 투입된 백성들은 더위에 속수무책이었다. 왕의 근심도 깊어졌다. “공역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끙끙대고 헐떡이는 모습을 생각하니 밤낮으로 떠오르는 일념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이러한데 어떻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뛰어난 한의학자이기도 했던 정조는 신약 개발에 착수했다. 일사병 같은 온열질환에 노출된 백성들에게 나눠 줄 치료제 개발이 시급했다. 그 많은 인부들에게 약을 배부하려면 대량생산 시스템도 갖춰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이 ‘척서단(滌暑丹)’이다. 정조는 6월25일 척서단 4천정을 하사하며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정 또는 반정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도록 하라”고 하명했다. 왕이 직접 노동자 복지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온열질환에 대처한 특이 케이스다.

그러나 폭염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전번에 더위 식히는 약을 준 것은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한다는 의미이지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정조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해 7월6일 무더운 시간대에는 작업을 멈추라는 전교를 내렸다.

왕은 “성을 쌓는 공사장 중 돌을 뜨고 기와를 굽는 여러 곳에서는 뙤약볕 가운데 서 있게 되므로 부역하는 일은 서늘한 기운이 생길 때까지 멈추도록 하라” 이르더니 “한 가지라도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설사 공사가 며칠 안에 이뤄지는 효과가 있더라도 나의 본뜻은 아니다” 말했다. 공기 단축보다 백성의 안위가 먼저였다.

하늘은 무심했다. 더위가 연일 맹위를 떨치자 성곽 공사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이를 타개하고자 수원부 유수 조심태가 급히 정조를 찾았다. 기우제에 대해 아뢰고자 함이다. 이때 왕이 답했다. “성을 쌓는 일도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많은 사람을 부려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비록 볕을 가린 곳이거나 탁 트인 곳에서 일하는 인부일지라도 본인이 원하는 바에 따라 부역을 정지시켜 비가 오거나 서늘한 기운이 생기기를 기다리도록 하라.” 가히 오늘날 ‘작업중지권’의 맹아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겠다.(이 글에 인용한 역사적 기록은 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40책 40권 22장 A면, 23장 A면, 24장 A면을 참조함)

더워서 힘들 땐 ‘쉴 수 있으면’ 충분하다

별 생각 없이 화성박물관을 구경하던 나는 ‘어?’ 하고 걸음을 멈췄다. 화성의 축성과정을 보여주는 시청각자료에 시선이 꽂혔다. 단 두 줄의 자막이 나를 잡아 세웠다. “심한 더위로 성벽에 관한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성 쌓는 역사를 잠깐 정지했다가 찬바람이 나거든 다시 시작하라.”

조선시대, 폭염작업, 작업중지권이라. 참으로 묘한 조합이었다. 그즈음 나는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 고용노동부가 입법예고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안전보건규칙) 개정안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지난해 10월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면서 폭염·한파에 따른 건강장해 예방을 위한 사업주의 보건조치가 의무화됐다. 노동부의 안전보건규칙 개정안에는 법률에서 위임한 보건조치의 세부사항이 담겼다.

가끔은 법이나 제도가 실속 없는 잔소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저래서 입법취지가 달성될까?’ 의구심이 드는 순간엔 더욱 그렇다. 안전보건규칙 개정안은 사업주가 취해야 할 보건조치를 실내작업과 옥외작업으로 나눠 규정했다. 폭염작업이 실내에서 이뤄지면 ‘냉방·통풍을 위한 온·습도 조절장치 설치’와 ‘작업시간대 조정’을, 폭염작업이 옥외에서 이뤄지면 ‘작업시간대 조정’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폭염작업이 계속되면 그제야 ‘적절한 휴식시간’을 부여하도록 했다. 이걸로 부족했는지, 연속공정 등 작업 성질상 휴식을 부여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장비지급으로 갈음하도록 예외조항을 달았다. 그것참, 휴식 한번 하기 되게 어렵네.

그뿐인가. 작업현장의 실제 온‧습도와 거리가 먼 체감온도를 규제의 기준으로 삼은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야외작업 온열관리에 적합하게 고안된 WBGT(습구흑구온도지수) 측정치를 활용하지 않을 합리적 이유가 없다. 결정적으로 규칙 개정을 통한 온열질환 보호대상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국한된다. 두꺼운 보호복을 입고 뙤약볕 속을 달리는 플랫폼 배달노동자는 해당사항이 없다.

노동부는 이번 규칙 개정으로 향후 10년간 총 5천199억8천772만5천200원의 편익이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온열질환 감소로 산재요양지급비나 근로손실일수가 줄어들고, 생산성은 늘어날 것이라 전망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노동부 분석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다. 때론 단순한 게 최고의 미덕이다. 너무 덥거나 추울 때 노동자가 힘들다 말하면 쉴 수 있게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법과 제도는 이를 실현하는 수단일 때 효용가치가 있다.


하늘의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

세상에, 조선시대 작업중지권이라니. 내 마음속 생각의 조각들 사이로 정조의 혁신적 행보가 한자리 차지했다. 정치적 명운을 건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백성들에게 온열질환 치료제를 개발해 나눠주고, 더우면 쉬게 하고, 작업자가 원하면 부역을 정지하도록 보장했다는 임금의 스토리는 판타지 사극의 한 장면 같아 보인다. 오늘날의 법과 제도가 231년 전 조선시대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그러나 내 마음을 완전히 녹여 버린 건 인간을 대하는 그의 태도다. “한 가지라도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리더로서의 품격과 자질 말이다. 정조는 자신이 머무는 처소에 ‘만천명월 주인옹(萬川明月 主人翁)’이라고 써 놓고 호로 삼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계층이 아닌 만백성에 두루 미쳐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은 어떠한가. 세수결손을 메우려고 정부가 지난해 산재보험기금에서 1조6천억원이나 끌어 썼다는 뉴스는 충격 그 이상이다. 부자를 위한 감세정책으로 나라 곳간이 비니까 산재보험기금을 가져다 세금 돌려막기에 써먹었다는 얘기다. 더욱 기가 막힌 건 정부가 지난해 노동자 산재예방사업에 쓰라고 내놓은 국고지원금이 137억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1조6천억원과 137억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 특권층이 아닌 만백성의 행복을 바랐던 세상을 정확히 거꾸로 뒤집은 자리에 우리가 있다. 탐욕의 우두머리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노동자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만천명월 주인옹. 더디 오는 봄을 기다리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지도자를 아쉬워하는 오늘이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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