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17 08:06
가짜3.3은 ‘사각지대’ 아닌 ‘차별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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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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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지대. 사전적으로는 ‘어느 위치에 섬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는 각도’를 의미하고 레토릭으로서는 ‘관심이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구역’을 일컫는다. 노동법의 영역에서, 특수형태 근로종사자, 플랫폼 노동자 혹은 3.3% 사업소득세를 원천징수하고 4대 보험에도 가입되지 않은 채로 일하거나 프리랜서 계약 등의 외관을 띠고 일하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흔히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들 한다.
그곳에 방치된 노동자들에게도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선의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겠으나, ‘노동법의 사각지대’라는 표현은 적확하지 않다. 노동법이 충분히 세련되지 않아서, 혹은 현대식 산업구조가 지나치게 새로워서, 노동법이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불가피한 노동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동법은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과 헌신 덕에 (여전히 미비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이미 충분히 세련되고, 자본주의의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은 없는 바, 타인의 노동을 헐값에 수취해 잉여가치를 수탈하는 자본이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다 거기서 거기다. 취약 노동이라는 것이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사각지대는 아니라는 거다.
인간은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외계 생명체들만이 알고 있는 법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규제받고 처벌받는 것이 아니다. 법은 그 적용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인식 너머에 있지 않다. 법의 내용을 알고서 그 규제를 피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법의 성가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어쩌면 당연한 조건반사다. 가끔은 우리 노동법률가들이 노동자들을 위한 법적 조력의 맥락에서 행하는 바이기도 하다. 물론 부르주아의 주구를 자처하는 법률가들 역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노동법의 적용을 회피하면서 보다 편안하게 착취할 수 있습니다.”
프리랜서 계약 등으로 위장된 가짜3.3 노동은 ‘노동법의 사각지대’가 아니라, 노동법의 성가심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사용자들과 (그들이 노동자들로부터 앗아간 잉여가치의 일부를 나눠 먹고서) 사용자들에게 협력하는 부르주아 법률가들이 협잡해 만들어 낸, 하나의 작품이다. 시민법의 수정으로서 노동법이 태동된 이래로, 그것은 신성한 ‘계약의 자유’에 기초해 갑을관계에도 아랑곳 않고 노동자들로부터 무한정의 잉여가치를 수탈하기를 원하는 사용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테다. (어쩌면 그 자체로 법적 규제를 회피하며 이윤을 추구할 수 있으리라는 동기에서 개발된) 여러 물리적・사회적 기술들로 인해, 마치 노동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른바 ‘사각지대’를 작위적으로 창출할 수 있게 됐을 따름이고, 이곳은 사용자들의 놀이터가 됐다. 노동법의 질곡에서 해방되면서도 노동자들로부터 부불(不拂)노동을 온전히 수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취약노동자들의 공간을 우연히 드러난 ‘노동법의 사각지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준비된 ‘차별지대’다. 종속적 지위에서 타인의 이윤을 위해 자신의 피땀으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해 내는 노동자들은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규정된 근로조건의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다. 마치 ‘근로자’가 아닌 것처럼 사용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위장된 가짜3.3 노동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착취를 할거야~ 착취를 할거야~ 아무도 모르게~ 나만을 위하여~”라고 노래 부르는 ‘차별지대’의 입안자들에게, 철저한 근로감독으로 노동법의 준엄함을 상기시켜야 한다. “나를 지켜봐 줘~ 나를 지켜봐 줘~~”라며 관심을 갈구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노무제공자’ ‘일하는 사람’ 같은 회색 개념을 입법화해 차별지대를 사각지대로 인가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차별지대로 내몰린 노동자들이 다시 노동법의 테두리로 돌아와 보호될 수 있을지(예컨대 근로자성 입증책임 전환 등)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노동법의 사각지대는 없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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