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18 07:50
아무도 대중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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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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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차갑게 식는다는 말을 체감했다.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이가 실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며 매우 높은 확률로 부정선거론을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처음 고양이 배변 냄새를 맡았을 때와 같은 배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렇게나 귀여운 생물체가 그렇게나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처럼 이리 좋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음모론을 신봉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대화를 한다고 해서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부정선거론과 같은 음모론은 일종의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는 걸로 수정된다면 어디 그게 음모론이겠는가. 음모론은 정보가 부족하거나 비합리적이라 믿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음모론자들은 일반인에 비해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합리적이다. 상당수의 음모론자들이 ‘계몽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오히려 본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정보를 몰라서 문제라고 강하게 확신할 때 비로소 음모론자가 탄생한다.
어떻게 이리 되는 걸까. 인지부조화 개념을 다룬 <예언이 끝났을 때>에 따르면 인간이 음모론에 빠지는 이유는 그가 그 믿음에 너무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든 돈이든 노동력이든 무엇이든 간에 투자한 게 많으면 많을수록 믿음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강한 믿음상태를 유지하고자 설명은 보다 정교해지고 정보는 더욱 풍부해진다. 그렇게 형성된 믿음의 체계는 타인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실증되고 내면화된다. 사이비종교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일이 곧잘 일어나는 건 이런 맥락에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믿는 게 아니라 투자한 만큼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부정선거론자를 볼 때마다 불안해진다. 그들은 지금 너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정치적 판돈은 날이 갈수록 더욱 커지는데 출구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와서 재판결과에 승복하겠다고 선언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저 높게 쌓인 판돈을 어떻게 다 회수하려고 그러는지 겁이 날 지경이다. 보수 진영이 할 일은 지금이라도 판돈을 최소화해 혹시 모를 정치적 파국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극우적 대중들은 투자한 게 아까워서 더욱 극우화되거나 더 괴상한 믿음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예언이 끝났을 때>에 나온 종교집단은 자신들이 예상한대로 세계에 종말이 오지 않았을 때 믿음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들의 기도 덕분에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식의 설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판돈을 줄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영역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의 시선이, 클릭이, 관심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대중을 거스를 수 있는 정치인, 지식인 등이 몇이나 될까. 대중의 믿음이 아무리 해괴망측한 것일지라도 그들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이들이라면 어떻게든 그 믿음으로 드러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그 결과가 앞서 본 바와 같이 판돈이 무제한적으로 커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판돈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건 정당뿐이다. 오직 정당만이 대중과 싸우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다. 본래 마르크스주의 정당론은 대중과 지식인, 인텔리겐치야의 통일적 관계의 형성을 지향해왔다. 인텔리는 대중으로부터 삶을 배웠고 대중은 인텔리로부터 진리를 배웠다. 인텔리의 진리가 공허한 문구로 남지 않을 수 있고, 대중이 주어진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정당 속에서 서로 가르치며 배웠기 때문이었다. 정당이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할 때 인텔리와 대중은 각각 그가 속한 세계에 갇혀 사회적 비용만 키우게 된다.
아무도 대중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대중으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세계지만, 그럴수록 정당이 비용을 짊어지려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꼭 국민의힘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당이든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방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는 저들을 가르쳐야 한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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