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4-29 07:49
여성노동자의 발, 신발이 말하는 노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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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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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2만 보를 걷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염에도, 한파에도요.”
서울도시가스 점검원 김효영 조합원의 말입니다. 수천 세대를 돌며 검침과 점검, 고지서까지 전달해야 하는 그녀의 발은 늘 닳고, 신발은 언제나 닳아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작업화를 지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늘도 사비로 산 신발을 신고 현장을 누빕니다.
공공운수노조는 4월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을 맞아 <여성노동자의 발, 신발이 말하는 노동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현장의 작업화와 노동자들의 에피소드를 모았습니다. 이것은 신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노동자의 삶과 건강권에 대한 증언입니다.
물과 기름 위에서 일하는 손, 그리고 발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희숙, 박상임 조합원은 장화의 변천사를 들려줍니다. 싸고 가벼운 장화는 미끄러워 사고가 잦았고, 미끄럼 방지 장화는 무거워서 일의 능률을 떨어뜨렸습니다. 최근 등장한 안전장화는 딱딱하고 불편해 오히려 발에 고통을 줍니다. “안전할수록 무겁고 불편해지는 작업화, 안전을 위해 선택한 장비가 오히려 위험을 만들 수 있다”는 조합원들의 말에는 씁쓸함이 묻어납니다. 급식노동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꼭 맞는 작업화, 온종일 종종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그리고 그 여유를 받쳐줄 충분한 인력입니다.
신발은 곧 노동의 궤적입니다. 학교에서 청소하는 주은주 조합원은 신발 하나로 자신의 노동사를 풀어냈습니다. 대기업 사무직 시절, 자부심을 상징하던 높은 구두는 결혼과 육아, 경력단절을 거쳐 학교청소 노동자의 운동화로 바뀌었습니다. 육체노동으로 매년 닳아 없어지는 운동화는 그녀의 몸처럼 변형되고 낡아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직업과 내가 신는 신발은 점점 더 닮아간다”는 고백에는, 여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역할 변화, 불안정한 일자리, 무시되는 건강권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단정함’이 만든 불편함, 그리고 위험
항공승무원 편선화 조합원이 공유한 ‘기내화’는 외관상의 ‘단정함’을 이유로 강요된 구두입니다. 하루 1만5천보 이상을 걸으며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책임지는 승무원에게 구두란 단지 불편한 것을 넘어 위험한 장비입니다. “운동화는 편안함이 아니라 생존의 장비”라는 말처럼, 노동현장의 신발은 단순한 복장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보호구입니다. 최근 항공노동자들은 ‘#승무원에게_운동화를!’ 캠페인을 벌이며, 구두 착용 강요 관행 개선과 건강권 보장을 외치고 있습니다.
울산지부 청소노동자 최정영 조합원이 “직접 가서 골랐다”며 흐뭇해한 5만7천200원짜리 신발은, 왜 노동자가 직접 작업화를 골라야 하는지 되묻게 합니다. 건강을 지킬 권리, 신체에 맞는 작업화를 제공받을 권리는 노동자 안전의 가이드라인입니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는 저임금, 비정규직, 낮은 발언권 등으로 인해 산재보험 신청조차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건강권은 늘 뒷전으로 밀립니다.
여성노동자 발은 지금 어디에 섰을까
수없이 걷고, 무거운 것을 들고, 미끄러운 바닥 위에서 하루를 버티는 여성노동자의 발. 그 발을 감싸는 신발은 단지 소모품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건강과 존엄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비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현장에서 신발은 ‘작은 남성용’에 불과하거나, 외관상 보기 좋음만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여성의 신체적 특성과 노동의 현실을 반영한 보호구 지급이 절실합니다.
4월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야기와, 더 구체적인 대책입니다. 작업화에서 시작된 이 작은 이야기들이, 여성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한 더 큰 목소리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여성노동자의 신발은, 곧 노동의 역사입니다. 여성노동자의 발은, 오늘도 노동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오승희 공공운수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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