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02 08:03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 차기 대통령 결단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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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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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내가 일하는 일환경건강센터에서 길 하나 건넌 자리에 SPC 청주공장이 서 있다. 공장 옆 좁은 도로를 지나며 이런 생각을 한다. ‘다음은 여긴가?’ SPC그룹 계열사에서 반복되는 중대재해는 우리나라가 산재공화국으로 불리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사안일> 서른두 번째 사연은 어떤 한 사람을 향한 촉구 서한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수신자는 차기 대통령이다.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위해 산업안전보건 문제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격상하고 대통령이 직접 문제해결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규제 완화 내세운 국민의힘
21대 대통령선거 본투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악스러운 네거티브 공세 속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표가 되느냐’ 여부로만 의제를 선별하는 수준 낮은 정치 관행 때문이다.
기술적‧제도적 개선이 요구되는 산업안전보건 이슈로 특정 후보의 선명성을 부각하기는 어렵다.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드러내기 쉬운 경제‧복지‧외교 이슈나 막장경쟁으로 치닫는 인신공격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이유다. ‘진짜 실력’을 겨룰 의지가 약한 후보들 사이에서 산재문제가 찬밥 취급을 받는 건 정해진 귀결이다.
최종 개표결과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어차피 대통령은 둘 중 하나다. 그래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산업안전보건 공약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국민의힘 핵심 공약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노동시간제도 유연화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완화다. 해당 내용은 ‘투자하기 좋은 나라’와 ‘노동 개혁’ 항목에 포함됐다.
공약의 논리구조상 국민의힘은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노동시간과 산업안전보건 제도를 기업경영의 방해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산재예방을 위한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앞세우기보다는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기조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기업의 자율성은 위험을 관리하기보다는 은폐하고 전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국민의힘은 규제혁신처 신설, 자유경제혁신기본법 제정, 규제혁신기준국가제 설정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대상에 혁신의 빨간딱지를 붙이겠다는 발상이다. 국민의힘이 재집권한다면 노동시간제도와 중대재해처벌법은 규제개혁 수술대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 책임 강조한 더불어민주당
더불어민주당의 산업안전보건 공약도 핵심은 두 가지다. 산재보험제도 개선과 산재예방시스템 강화다. ‘노동존중 및 권리보장’ 항목에 포함됐다.
민주당은 산재보험제도 개선방안으로 △적용대상 확대 △보험급여 선 보장 △신속‧공정한 보상체계 구축을 약속했다. 산재예방시스템 강화방안으로는 △정부 내 노동안전보건체계 통합 운영 △산재예방시스템 전면 개편(안전보건공시제 도입 등) △노동자‧노동조합 참여 확대(노동자 작업중지권 강화 등)를 제시했다. 국민의힘과 비교했을 때 정부의 책임성을 강화하겠다는 방향성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문재인 정부 시절 사회적 대화 성과물인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에 대한 내용이 빠지면서, 산재예방 총괄 컨트롤타워의 구체적 상이 사라져 버렸다. 민주당 공약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그렇다고 산업안전보건청을 대체할 합리적 대안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긴 시간 진통을 감내하며 사회적 대화에 참여한 노사정 대표자들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민주당은 차후에라도 사회적 대화의 성과를 정식의제로 채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존중을 표방하는 정당의 기본자세다.
중대재해는 왜 반복되나
안타깝게도 두 당의 공약에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급하게 치러지는 선거임을 감안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어떤가. 멀쩡히 출근했던 사람이 부러지고, 으스러지고, 뭉개지고, 터져서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욱 끔찍한 건 그런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지난해에만 2천98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다.(산재승인 기준, 사고‧질병 포괄) 산재로 인한 사고사망만인율(0.39)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두 배를 웃돈다.
2022년 SPL 평택공장, 2023년 샤니 성남공장에 이어 지난달 19일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발생한 노동자 사망사고는 현장의 부주의나 불운한 사고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이 처참한 사고의 배후에는 제빵공장에 잠재한 각종 유해‧위험요인 외에도 SPC그룹의 후진적 가족경영체계, 지주회사와 복수의 계열사로 이뤄진 그룹 지배구조에서 나타나는 책임의 분산, 막장의 노사관계와 노동자 참여의 부재, 실효성 낮은 법과 제도, 사회적 감시의 한계 같은 다중 요인이 얽혀 있다.
모든 일터가 그렇듯 빵을 만드는 공장도 위험하다. 제과제빵 생산공정은 반죽기‧믹서‧커터기‧오븐‧컨베이어 같은 대형설비 가동에 의한 기계적 위험, 반복작업과 중량물 취급에 의한 근골격계 부담, 밀가루 분진과 세척제 노출에 의한 호흡기‧피부질환, 야간‧교대근무에 의한 생체리듬 교란 같은 다양한 유해‧위험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작업현장의 유해‧위험요인은 오너 일가 중심의 폐쇄적인 경영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방치되고 악화된다. SPC 지배구조의 정점은 허영인 회장이다. 그는 지주사 격인 파리크라상을 그룹 꼭대기에 두고 SPC삼립을 비롯한 거의 모든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두 아들 역시 높은 지분을 보유했다.
허 회장은 특히 전 계열사 노조현황을 직접 보고받으면서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거나, 복수노조를 활용해 노조활동을 통제한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부당노동행위와 억압적 노사관계는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위험신호를 무시하거나 은폐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프로야구 팬들이 제기한 ‘크보빵’ 불매운동도 파급력 차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SPC는 파리바게트‧던킨‧배스킨라빈스 등 소비자 일상에 밀접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B2C(Business-to-Consumer) 기업이다. 노동자 사망사고 같은 중대재해가 발생하더라도 해당 계열사를 제외한 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 허 회장이 지금까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소환되지 않은 것도 이런 기업구조에 원인이 있다. 위험에 대한 책임이 흩어지는 구조다.
대통령직속 산업안전보건특별위 설치해야
산재예방을 위한 ‘확실한 한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에 쉬운 답이 있을 리 없다. 안전관리 강화와 안전보건 경영을 위해 3년 동안 1천억원을 투자하겠다던 SPC의 현재 상태가 이를 증명한다. 개별기업 단위의 단편적 접근으로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실효성 있는 산재예방 전략은 다층적이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중대재해처벌법도 고쳐야 한다. 기업들은 대형로펌과 법무팀을 앞세워 법망을 빠져나가기 일쑤다. 실제 경영책임자까지 형사책임이 미친 사례는 극소수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죽어 나자빠진 뒤에야 부실한 관리실태가 드러나는 뒷북치기 법이 무슨 소용인가. 중대재해 발생시 기업이 안전관리의 적절성을 스스로 입증하도록, 그래서 실질적인 재해예방 효과에 다가가갈 수 있도록 법을 깐깐하게 고쳐야 한다. 이는 사후처벌보다 사전예방이 중요하다는 정치권 공통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산업안전보건 문제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격상하고 국가 최고책임자의 임무로 끌어올릴 것을 요구한다. 대통령직속 산업안전보건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대통령이 직접 보고받고 지휘하는 시스템 도입에 대한 전향적 검토가 필요하다. 민주당이 산업안전보건청 공약화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과정에서 노동부에 권한을 실어주는 방안이 대안으로 검토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 역시 슬그머니 사라진 걸로 볼 때, 부처 간 견제가 작동하는 구조에서 힘이 빠져버린 게 아닐까 예상해 본다.
차라리 대통령이 나서라. 반복되는 산재는 국가 경제와 기업의 경쟁력을 좀먹는다.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관점에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국가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하고 법‧제도 개선, 예산 편성, 감독기관 역량 강화, 사회적 대화 촉진, 기업‧노동계 신뢰 구축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문화와 사회 인식, 노사관계 혁신을 포괄하는 통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반복되는 죽음을 막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며, 그 실행을 이끄는 리더십이다.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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