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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6-09 08:28
우리가 문제다
 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13  
기묘한 미소가 번졌다 ​

의자에 앉은 연인 중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이 거리에 퍼지는 음악에 맞춰 상체에 리듬을 싣고 손을 움직이며 율동을 탄다. 울려 퍼지는 것은 “일어서라 그대여, 투쟁하라 그대여, 혁명의 투혼으로 세계를 변혁하라”는 노래다. 일하고 있는데 창문을 뚫고 크게 들려오는 저 음악이 내겐 소음처럼 들린 지 꽤 됐는데, 그 소리에 맞춰 몸을 흔드는 모습에 냉소도 미소도 아닌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저 민중가요들이 소음을 일으키기 위한 도구일까. 언제부터 관공서 앞에서 이들의 시위가 시작됐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것 같다. 그들은 최대한 크게 음악을 틀어서 자신들의 요구를 알리고 싶을 것이다. 시위란 그런 면이 있다. 그들이 몇 시간씩 틀어 놓는 노래가 그들의 서사와 어울리지 않을 내용도 있는데, 관공서를 시끄럽게 만들고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 이목을 끌려는 도구다.

요구는 절박할 수 있는데 그걸 말하려 틀어 놓은 노래가 짜증을 일으키는 이 기묘한 느낌은 뭘까. 그들은 그들이 아는 방식으로 압력을 가한다. 나는 저 가요의 대부분을 알고 목청껏 불렀던 사람 중 하나다. 그 노래가 탄핵을 위해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아이돌 노래에 비해 낡았다고 할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관심을 끌기 위한 ‘어그로’가 있듯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각자의 요구와 문화가 있다. 좀 더 나은 시위방식을 개발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저 웃을 뿐.

그냥 삼킨 말​

편법과 불법에 대한 반성은 없고 반독재·민주화 무용담이나 늘어놓으며 자식 세대에게 훈계나 일삼는 부모 세대에 대한 반발, 저성장기에 아버지처럼 가장 역할을 못 하게 된 억압된 욕망, 놀며 다치기도 하면서 자라는 남성성을 디지털 세계에 빼앗긴 세대의 특징, 또래 여성보다 발육이 늦은 아동기를 보내고 의자에 붙어서 집중력을 발휘하는 ‘엉덩이 힘’이 필요한 공부에서도 여성에 뒤진 학창시절을 거쳐 ‘엉덩이 힘’이 중요해진 직업의 세계에서도 밀려난 수치심, GAME하며 가상 세계에 붙잡혀 관계 형성에 미숙해 짝짓기에 번번이 실패하는 좌절된 수컷의 욕망, 1인 가족과 1인 노동이 늘어난 고립된 세계의 불안한 영혼과 극단주의의 결합 등.

이십대 남자(이대남)가 왜 보수화되고 심지어는 극단주의에 이끌리는가에 대한 저마다의 분석이 쏟아졌다. 언론과 SNS와 술자리에서도 화제로 오른다. 이대남의 보수화를 전제한 분석, 각종 통계를 근거로 청년의 보수화는 잘못된 얘기라는 주장, 이대남의 보수화보다 젊은 여성의 진보화에 주목하자는 얘기가 엇갈린다.

어쨌든 기성세대를 물고 뜯고 비난하기만 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할 비전과 세계관이 없다면 박탈감·분노·혐오·불안·적대에 휩싸여 투정하고 엇나가는 미숙한 아이에 불과하다는 자못 준엄한 얘기도 이어진다. 얘기를 듣다가 문뜩 이대남을 탓할 뿐 우리 세대의 성찰은 1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은 순간 ‘이대남보다 우리가 더 문제야’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지만, 대화에 찬물을 끼얹을 것 같아 삼켰다.

새 언어를 듣지 못했다​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에 어떤 언어가 피었을까. 혹할 언어가 있었을까. 지나친 기대였나 보다. ‘내란’ ‘계엄’ ‘민주주의’와 같은 용어들이야 12·3 내란사태 이후 계속된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 없다. 거꾸로 세상의 이목을 끌고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른 단어는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젓가락’ 따위다. 이 그치지 않는 퇴행.

기괴한 그림이 남았다. 언론이 서쪽은 빨간색, 동쪽은 파란색으로 칠해 지역별 투표 결과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소수정당을 제거한 이 그림은 정치 양극화를 보여주며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다. 우리의 선택은 둘 중 하나로 유도된다. 쭉 그랬다. 방송 뉴스는 빨간쪽과 파란쪽만 불러 치고받는다. 오직 두 색으로 단순화된 그림은 복잡계를 사는 고달픔을 단순하게 승화시켜 주려는 선물일까. 아니라면 삼천리 화려 강산을 오직 빨강과 파랑으로만 도배질한 기괴한 그림이다.

아이들이 가장 안전해 보이는 방 안에서 편향된 정보를 따라 극단주의의 위험에 빠지게 하는 온라인 세계, 시민들이 고립과 불안을 느끼게 하는 1인 가족과 1인 노동이 늘어난 세계. 부산 여성의 광장 발언처럼 많은 시민들이 실제로 소속감을 가질 적절한 사회가 없다면, 이 세계를 만든 것은 너와 나, 우리다.

경제가 급격히 위축될 때 노사의 사회지능이 떨어졌다. 노동자의 후생과 복지를 높이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사용자는 외주화했고, 노동자는 자기 일자리를 지키려 잘라 낼 비정규직 늘리는 것을 용인했다. ‘킹산직’이라 불리는 사회가 생겼지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사회를 잃었다. 평범한 노동자가 자신들만의 사회를 위해 타인들의 사회를 제거하는 데 참여한 것이다. 이런 사건이 축적되면서 ‘비정형’ ‘알바’ ‘사각지대’ ‘불안정노동’ ‘프리랜서’가 늘었고 이런 노동시장에 수많은 청년이 진입한다. 그런 청년들이 품은 불만과 분노를 부당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운동 좀 하세요​

의사의 처방은 늘 분명했다. 혈압·당뇨·체지방을 비롯한 각종 수치가 올라간 것을 본 의사가 처방하는 것은 술·담배를 줄이거나 끊고 운동 좀 하라는 것이다. 너무 빤한 처방인데 중요한 처방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 당연한 것을 실행하면 확실히 건강은 좋아진다.

“자원 배분을 제대로 하라니까 자기들끼리 자리 배분만 하니 망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고위직을 지내고 이번 선거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여준 자치구 단체장을 하고 있는 이가 몇 년 전에 했던 말이다. 새 대통령이 잊지 않기 바란다. 지지자들도 잊지 않기 바란다. 내란세력 청산은 누군가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계엄을 일으킨 사고와 습성을 넘어설 언어·세계관·관계를 창조하는 행위여야 한다.

온·오프라인의 가까운 사람들 투표 성향을 보면 권영국 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돼야 했다. 그러나 실제 득표는 한 줌에 불과했다. 주변과 전체의 괴리는 엄청난데 이 간극을 제대로 진단할까. 편법적인 위성정당에 참여해 의석을 받더니 이번 대선에서는 내란 척결을 명분으로 다른 정당 후보를 지지한 것이 ‘정치 연합’인지 ‘기생 전략’인지 모르지만, 이재명 선거운동 조직이 된 군소정당을 두고 논란을 벌이는 것이 진보정치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1%에 갇힌 진보를 보는 것이 괴롭다.

세계를 바꾸고 싶은데 새로운 언어와 주체를 만드는 데 미치지 못하는 결핍된 욕망을 본다. 기술권력은 인공지능 개발에 몰두한다면 진보세력은 사회지능을 개발해야 하는데 이런 개념이 없다. 한국의 진보정당에서 어설픈 자기 위로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킬 창조의 아픔이 시작되길 바란다.

정치보다 사회가 운동해야 한다. 정치와 사회운동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둘은 다른 것이다. 운동 없이 건강한 몸 없다. 역동적 운동 없이 건강한 정치 없다. 탄탄한 사회운동 없는 진보의 욕망은 진보정치 낭인을 만들 뿐이다. 정치 지망생 한 명이 생길 때마다 사회운동 촉진자 100명 정도가 더 생겨야 새로운 언어와 세계관을 가진 주체가 탄생하지 않을까. 소음처럼 들리는 민중가요에 춤추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세상은 그런 리듬에 춤추지 않는다.

조건준 아유 대표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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