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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6-30 10:26
‘표지 없는 독’ SPC 크림빵과 절삭유 용기의 미스터리
 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118  
애초에 그곳에 있어선 안 될 물건이었다. 갓 구워낸 빵을 식히기 위해 복층 구조의 나선형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공간. 지난달 19일 또 한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SPC삼립 시화공장 사고현장에서 의문의 기름통 하나가 발견된다.

그 통의 표면에는 ‘금속 절삭유’(Cutting fluid/for all metals)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주요 성분은 고농도에 노출될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염화메틸렌. 포장을 기다리는 크림빵과 같은 공간에, 식품 공정에 사용돼선 안 될 화학물질의 보관용기가 놓여 있었다는 기묘한 이야기다.

이것은 단순한 관리 실수일까. 아니면 오래도록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화학물질 관리 실태일까. <무사안일> 서른네 번째 사연은 기름통 하나를 둘러싼 추리물이자, ‘표지 없는 독(毒)’에 대한 경고문이다.

작은 용기 하나가 드러낸 ‘위험한 일상’

절삭유는 제조업에서 흔히 사용하는 화학물질이다. 금속이나 비금속을 깎고 자르고 다듬는 공정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히고(냉각) 마찰을 줄이기(윤활) 위해 사용한다. 석유 찌꺼기(기유) 함유량이 80~90% 이상이면 비수용성, 물이 절반 이상 섞이면 수용성으로 분류된다. 기유가 많을수록 윤활성이, 적을수록 냉각성이 뛰어나다.

문제는 여기에 방부제·방청제·윤활제·계면활성제 같은 수십 가지 화학성분이 첨가된다는 점이다. 그 자체로 화학적 유해요인이다. 특히 수용성 절삭유는 부패할 경우 세균과 곰팡이의 번식처가 된다. 분사시 공기 중에 퍼진 미스트에 유해 미생물이 함께 확산된다. 생물학적 유해요인이다.

독한 화학물질과 유해한 미생물은 피부와 호흡기를 통해 인체에 흡수된다. 절삭유는 피부염이나 천식, 호흡기 염증을 유발하고, 장기간 노출되면 골수 손상으로 인한 무형성빈혈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절삭유 취급 노동자가 이 병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례도 있다. 일부 성분은 발암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렇게 독한 물질의 보관용기가 어쩌다 크림빵 공정 안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당시 사망한 노동자는 이 위험한 절삭유 통을 들고 냉각 컨베이어벨트에 윤활유를 뿌리다 기계에 몸이 끼는 참변을 당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절삭유가 실제로 사용됐는지 감정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문제의 용기를 맡긴 상태다. 과연 어떤 물질이 그 안에 들어 있었을까.

두 가지 가능성 ‘내용물인가, 용기인가’

SPC쪽은 사고 당시 사용된 윤활유가 식품용 ‘푸드 그레이드’ 제품으로 인체에 무해하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해석은 두 가지다. 첫째 금속 가공에 쓰이는 절삭유가 식품 제조에 사용됐을 가능성이다. 문제의 용기 겉면에 금속용 절삭유라고 명기돼 있고, 경찰은 해당 용기 외에도 그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과 포장 전·후 크림빵에 대해서도 감정을 의뢰했다. 현장의 상태를 보아하니 의심을 품을만한 여지가 충분했다는 뜻이다.

둘째 절삭유 용기만 재활용했을 뿐 내용물은 식품용 윤활유일 가능성이다. 제조업 현장에서 화학물질 전용 소분 용기 대신 음료수 페트병이나 굴러다니는 아무 통에 유기용제 같은 화학물질을 덜어서 사용하는 모습은 흔하게 발견된다. 어떤 물질이 들어 있는지 라벨이라도 붙여놓으면 다행인데 이 역시 엉망인 경우가 많다. SPC도 이러한 관행에서 예외가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가능성이 사실이든, SPC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식품위생법은 △유독·유해물질이 들어 있거나 묻어 있는 것 또는 그러할 염려가 있는 것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오염됐거나 오염될 염려가 있어 인체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을 채취·제조·수입·가공·사용·조리·저장·소분·운반·진열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식품위생법 2조4항). 국과수 감정 결과에 따라 SPC는 교차오염 관리 실패로 행정처분을 받거나 형사책임을 질 수도 있다.

식별되지 않는 위험, 이름 없는 통의 공포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화학물질 위험관리는 ‘식별 가능성’과 ‘오인 가능성’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어떤 물질이 담겨 있는지 아는 것이 안전의 출발점이다. 절삭유를 윤활유로 오인하거나 윤활유를 절삭유 통에 담아 사용하는 순간부터 노동자들은 불필요한, 그러나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따라서 사업주는 화학물질 취급설명서인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대상물질 취급 공정이나 작업장 내 노동자가 보기 쉬운 장소에 게시해야 한다. 또 화학물질을 덜어서 사용하는 소분 용기에도 위험을 알리는 경고표시를 해야 한다. MSDS 대상물질을 담은 용기나 포장에 경고표시를 하지 않으면 위반 횟수에 따라 3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산업안전보건법 115조,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170조).

이 사건의 본질은 윤활유냐 절삭유냐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용기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화학물질 식별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며, 작업현장 노동자의 건강권이 노골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징표다.

SPC 같은 대규모 식품기업조차 기본적인 안전 수칙을 무시했다면, 이는 구조적 문제다. 위험을 관리하지 않는 시스템, 알 권리를 외면하는 문화, 노동자 참여 없는 조직이 빚은 예고된 참사다. “절삭유가 아니었다”는 해명은 “표지가 없었다”는 사실 앞에 무력하다.

‘라벨이 떨어지는 순간’ 위험은 시작되고

문제의 통 안에 들어 있었던 건 단순한 작업용 기름이 아니다. 무너진 안전의 상징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공과 민간의 직업병 예방기관들이 손을 잡았다. 일환경건강센터와 서울근로자건강센터·경기남부근로자건강센터·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이 함께 ‘MSDS 경고표지 스티커 무상 제공 사업’을 진행 중이다.

경고표지가 없는 소분 용기로 인한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50명 미만 사업장을 대상으로 화학물질 라벨링을 지원하고 있다. 각 기관은 MSDS 정보를 토대로 스티커를 제작해 소분용기에 부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사업기간은 오는 11월까지다. 결국 안전의 승부는 사소한 디테일에서 가려지기 마련이다. 어떤 용기를 썼는지, 어떤 표지를 붙였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가 노동자 생명을 좌우한다.

‘라벨이 떨어지는 순간’ 화학물질의 위험은 시작된다. 통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위험이 있어도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시스템, 그것이 진짜 독이다. 지금도 일터 어딘가엔 표지 없는 독이 조용히 놓여 있을 것이다. 이름표조차 붙이지 않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며.

구은회 일환경건강센터 PL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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