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가범죄에 짓밟힌 23년 23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강기훈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법을 나서고 있다.(오른쪽 사진) 1991년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구속 기소된 강씨가 첫 재판을 받으러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유서대필 사건’ 재심…강기훈씨 23년 만에 누명 벗어 뒤늦게 진실 밝혔지만 짓밟힌 청춘은 어떻게 보상받나
켜켜이 쌓였던 분노와 억울함이 너무 무거웠던 탓일까. “피고인의 자살방조 혐의는 무죄입니다.” 이 한마디에 밝아질 법도 한 표정이 그대로였다.
13일 오후 2시30분께 서울고법 서관 505호 법정에서는 “무죄”라는 재판장의 말에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방청객 일부는 눈물도 흘렸다. 정작 강기훈(50)씨만은 덤덤했다. 변호인의 감격스런 포옹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나는 듯 웃음지었다. 이날 서울고법 형사10부(재판장 권기훈)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에 무죄를 선고했다. 23년 만에 찾아온 진실이었다.
1991년 봄,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노태우 정권의 실정과 공권력의 폭력에 항의하는 대학생·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랐다. 그중 한명인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의 자살 열흘 뒤인 5월18일 <국민일보> 사회면에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는 K모씨에 의해 대필되었다”는 검찰 관계자 말을 인용한 기사가 실렸다. 강씨의 험난한 운명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김기설씨의 동료였던 강씨는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았다. 수사관 앞에서 팬티를 내리고 항문 검사를 받고, 비둘기장(유치감)에 갇혔다. “영감님(검사) 나오신다”는 말이 들리더니 한 사람이 등장했다. “나, 신상규 검사다. 니들은 뽕쟁이(마약사범)나 똑같은 놈들이여.”(강씨의 재심 재판 최후진술서) 이후 잠을 재우지 않고 반복질문과 욕설이 계속됐다. 수사관들은 짜증을 냈다. “나도 퇴근 좀 하자. 이제 그만 자백하고 끝내자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도 필적감정 결과를 토대로 “강기훈씨가 김기설씨의 유서를 썼다”고 밝혔다. 그해 7월13일 강씨는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씨는 순진했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재판부가 있다면 금방 석방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2·3심 판사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2년 7월 강씨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을 확정받았다. 대전교도소 독방에서 배식구를 통해 받은 대법원 판결문 뭉치를 읽던 강씨는 판결문을 집어던졌다.
3년의 감옥살이를 마친 뒤에는 체념했다. 눈앞의 권력은 거대했고, 그 권력에 의해 겪었던 고통은 망령처럼 떠돌며 강씨를 괴롭혔다. 가정을 꾸리고 번역·학원관리직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일상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세상은 그를 품어주지 않았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유서대필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으로 자살방조 사건 판례를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는 처참한 심정이었다. 버스에서 강씨를 알아본 노인은 “저런 새끼는 죽어야 한다”고 욕했다. 직장을 다니며 업무로 만난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유서는 왜 써주신 건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강씨는 물론 가족과 지인들도 고통스러웠다.
악몽의 나날을 보내던 강씨를 위해 시민사회가 나서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을 펼친 끝에,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유서는 김기설씨가 작성한 것”이라는 결과를 발표하며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2009년 9월 서울고법은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하지만 검찰의 재항고로 재심 개시는 늦어졌다. 2012년 4월 강씨는 간암 판정을 받아 힘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몸이 지쳐가면서 싸울 힘도 사라졌다. 대법원은 2012년 10월에야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재심 개시를 확정했다.
그리고 1년2개월 동안 뜨거운 공방이 다시 이어진 끝에 이날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정치권력이 진실을 조작하면서까지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려 한 어두운 역사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강씨의 상처투성이 삶과, 암 투병에 지친 육신 앞에 ‘피고인은 무죄’라는 말은 너무 늦게 찾아온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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