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시·통제를 통한 배송속도 극대화 … 쓰러지는 노동자 ‘변화’를 외친다
한국은 ‘빠른 배송’ 중독 사회다. 마켓컬리의 새벽배송이 남긴 낯선 충격과 공포는 무뎌졌다. 소비자들은 도파민에 절여진 환자처럼 더 빠른 배송을 갈망하고, 퀵커머스(즉시배송)란 판타지가 현실이 됐다.
소비자의 빠른 배송 욕망. 기업들은 새로운 이윤축적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통과 택배·물류산업은 빠른 배송을 중심으로 전면 재편됐다. 자연스레 노동자들이 일하는 방식과 환경도 재구성됐다. 하지만 발 있는 인간은 발 없는 자본의 속도를 따라지 못했고, 산업은 제도를 앞질렀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과로에 시달리고 그중 일부는 세상을 등져야 했다. 이제 제도가 산업을, 노동자가 자본을 역전할 때다.
‘물류-택배-유통’을 잇는 빠른 배송
국내 빠른 배송 경쟁의 시초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세간에는 예스24가 2007년 최초로 당일배송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알려졌다. 이커머스업체로는 11번가가 2011년 예스24와 협업해 당일배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업체의 협업은 도서 상품에 한정됐다. 빠른 배송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놓은 회사는 쿠팡이다. 2014년 쿠팡은 밤 12시 이전 주문시 다음날 상품을 수령하는 익일배송 서비스를 도입했다. 도서가 아닌 전 상품군이었다.
그러자 2015년 컬리는 국내 최초로 새벽배송 서비스 ‘샛별배송’을 시작했다. 익일배송은 다음날 배송시간이 불확실했던 반면 새벽배송은 오전 7시 전 상품을 받아볼 수 있었다. 아침마다 새로운 식재료를 받아 볼 수 있는 서비스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3년 뒤 쿠팡은 컬리와 마찬가지로 신선식품 새벽배송 서비스 로켓프레시를 출시했다. 쿠팡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020년 당일배송까지 서비스를 확대했다.
‘하루’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분’으로
불과 1년 뒤 이커머스 빠른 배송 경쟁의 단위는 더 이상 ‘하루(days)’가 아닌 ‘시간 단위(hours)’가 됐다. 쿠팡이 배달플랫폼 쿠팡이츠를 통해 퀵커머스를 선보이면서다. 컬리는 좀 늦은 2024년 6월부터 도심형 물류센터(MFC)를 임대해 서울 마포구 일대를 중심으로 퀵커머스 서비스 ‘컬리나우’를 시작했다. 그뒤 도곡동에 물류센터를 추가해 강남지역까지 확대했다. 배달은 체인로지스가 대행하고 있다.
퀵커머스는 이커머스보다 편의점이 먼저 시작했다. 편의점은 점포 자체를 MFC로 활용할 수 있어 추가 물류센터가 불필요하단 점에서 시장진입에 유리했다. 2019년 코로나를 기점으로 편의점은 배달플랫폼사들과 협업해 배달을 시작했고, 2021년에는 GS25·CU·이마트24 등 주요 편의점 모두 퀵커머스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퀵커머스 시장을 대중화한 기업은 쿠팡도 컬리도 재벌 유통업체도 아니었다. 바로 배달플랫폼사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의 B마트였다. 라스트마일(최종배송단계)에 강점이 있는 배민이 퀵커머스 시장을 선점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019년 배민은 B마트를 론칭하고 2022년에는 ‘분 단위 초신선 장보기’란 콘셉트의 캠페인을 진행했다. 빠른 배송 경쟁이 ‘시간 단위(hours)’에서 ‘분 단위(minutes)’가 됐음을 선포한 순간이었다. 배민의 판단은 적중했다. 지난해 배민의 커머스 사업 주문자수와 주문수는 전년 대비 각각 49.4%, 38.8% 증가했다. 같은 기간 연간 거래액도 처음 1조원을 돌파했다.
배민의 성공은 유통업계에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초기 퀵커머스 시장은 녹록지 않았다. 소비자는 긴급한 소량 구매 외에는 여전히 대형마트에서 값싼 식품을 대량 구입했고, 취급 품목도 제한적이었다. 대형 유통사들이 그저 퀵커머스 시장을 관망했던 이유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소비자들은 퀵커머스 방식에 점차 익숙해지고 상품군도 다양해졌다. B마트가 취급하는 상품수는 1만여개에 이른다.
퀵커머스 경쟁은 대형유통업체까지 본격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유통 공룡 이마트가 이를 주목하고 있었다. 올해 초 이마트는 대형 점포를 활용한 퀵커머스 서비스를 시작했다. 2022년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해 중단했던 퀵커머스 사업을 재개한 것이다. 이마트는 쓱닷컴 PP센터를 MFC로 활용한 ‘쓱고우’를 론칭했다. 홈플러스도 일부 점포에서 퀵커머스 서비스를 도입한 뒤 점포를 늘려 나갈 계획이다.
빠른 배송 경쟁은 자체 유통 시스템이 없는 식품·화장품 등 제조업체들로 이어졌다. 물류사와 유통망을 가진 배달플랫폼사들과 협업을 통해 자체 상품을 빠르게 유통하는 전략이다. 특히 CJ대한통운은 2023년 3월 당일·익일·새벽배송 서비스를 통합한 오네(O-NE) 브랜드를 론칭했다.
이 같은 빠른 배송 욕망은 물류업계 환경도 바꿔놓았다. 판매자의 물건을 물류센터로 가져온 뒤 운반하는 단순 ‘창고’ 역할만 하는 물류 방식은 빠른 배송과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자 물류업계는 대규모 물류센터에 판매 재고를 사전 입고해 두고 주문과 즉시 출고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여기에 AI·자동화 시스템을 적용해 분류와 피킹·패킹 작업을 가속화시켰다. 바야흐로 ‘풀필먼트’(물류일괄대행) 시대가 열린 것이다.
빠른 배송이 불러온 빠른 노동
우리가 빠른 배송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경이로운 기술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노동 현장도 격변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노동자의 신음은 기술과 자본보다 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물류·택배·유통을 잇는 모든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기존의 업무방식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전국 상품은 풀필먼트 센터로 집중됐고, 자동화는 상품 출고 속도를 높였다. 노동자들은 상품 입출고 속도에 발맞춰 더 많은 상품을 더 빠르게 운반해야 했다. 쿠팡은 PDA를 통해 시간당 생산량(UPH)을 실시간 관리하면서 빠른 배송 욕망에 노동자들의 손과 발을 묶었다. 유통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배달플랫폼사들은 라이더의 위치정보를 수집하고 이동 거리와 시간을 책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송 속도 정보는 알고리즘으로 학습되고 노동자들의 배송 동선과 시간을 극단까지 ‘효율화’하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노동방식은 까다로운 ‘근로자’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근로시간·휴게시간 규정, 휴일·연장근로 제한, 해고 제한 등 법적 권리는 24시간 쏟아져 나오는 물류 속도를 늦추는 귀찮은 하소연에 불과했다. 자연스레 단기계약직·아르바이트 같은 취약한 고용이 확대됐다. 인간의 몸은 과로와 야간노동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본은 착취가 비용이 되지 않을 때까지 노동자의 신체를 생물학적 한계까지 소진시킨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물류센터 야간고정 노동자들의 작업환경 및 건강 수준’ 보고서에 따르면 물류센터 야간고정 노동자의 10명 중 7명은 자신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면장애·시력저하·위장장애 등 문제를 겪었다. 결국 수많은 노동자는 쓰러졌고, 그들 중 일부는 사망했다.
택배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택배노동자들은 쏟아지는 물량을 더 빨리 운송해야 했다. 빠른 배송이 멈추지 않자 노동도 잠들지 않았다. 새벽까지 쏟아지는 재고를 감당할 수 없자 택배노동자까지 상품 분류작업에 투입됐다. 법적 저항이 없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무급노동이 공론화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적막한 착취의 시간만큼 회사에는 조용한 이익이 쌓여갔다.
그럼에도 물류사의 유일한 고민은 쿠팡보다 ‘느린 배송’이었다. 쿠팡은 주말을 포함한 주 7일 로켓배송을 통해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다.
쿠팡의 약진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물류업계에서 CJ대한통운이 침묵을 깨고 올해 1월 가장 먼저 ‘주 7일 배송’에 뛰어들었다. 한진도 같은 길을 걸었다. 다만 차이는 있었다. CJ대한통운이 ‘주 5일제’ 근무제 등 과로방지책을 마련한 반면 한진은 협의 없이 강행했다는 점이다.
대형마트 노동자들은 부서 통폐합과 업무전환에 시달리고 있다. 한 대형마트 노동자들은 지원팀·영업팀·인사·총무팀 가릴 것 없이 모두 피킹·패킹 업무에 투입됐다. 인력 충원이나 수당은 없었다. 빠른 배송의 비용절감은 업무 강도를 압축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제 역전의 시간
늘 그렇듯 산업은 제도를 앞서간다. 노동법은 빠른 배송이 생산하는 대규모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산재보험은 쏟아지는 물량을 처리하며 쓰러지는 신체를 외면했고, 분류작업 같은 침묵의 외주화도 막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이제 “빠른 배송을 멈추고 쓰러지는 노동자를 보라”며 변화를 외친다.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로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이 꼽힌다. ‘특수고용·플랫폼노동’은 빠른 배송 노동환경을 관통하는 공통점이다. 원청 회사들은 사용자가 아니란 이유로 교섭 자체를 거부하면서 노사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노동 3권 박탈은 자명한 현실처럼 치부돼 왔다.
새벽배송에 쓰러진 물류노동자들은 심야배송에 대한 규제 강화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소리높이고 있다. 연속적인 야간노동을 제한하는 교대노동을 도입하거나, 야간노동 중 휴게시간을 늘리는 방안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심야노동이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의학적 영향을 연구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택배노동자들은 안전운임제를 도입해 과속·과로를 막자고 한다. 또 특수고용 노동자에게도 4대 보험 직장가입을 전면 적용하자고 한다. 배달노동자들도 배송 경쟁에 내몰지 않도록 적정 수준의 임금을 보장하자고 말한다. 플랫폼사의 알고리즘 통제도 규제가 필요하다고 소리높인다. 노동자들의 노동방식을 통제하는 알고리즘 설계방식은 비공개다.
박수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가장 먼저 서비스 공급 차원에서 고민해 봐야 한다. 속도에 의한 편익이 생기면 소비자가 돈을 더 지불하고 기업들도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해야 노동에 대한 적절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며 “또 CJ대한통운의 사례처럼 연속휴게·휴일 등을 사전에 노동자와 충분히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빠른 배송 노동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정부에게 ‘역전의 시간’을 요구한다. 기술에 앞서 제도를, 자본에 앞서 노동자를.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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