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기순환·정주금지 시대 넘어설 때 … “체류자격 차등 비자제도 바꿔야”
이주노동자 입장에서 ‘나쁜 사장님’에겐 뼈아프지만 냉정한 ‘사실’ 하나가 있다. 이주노동자는 감정·욕구·이성을 가진 인간, 자유의지를 지닌 ‘행위자’란 점이다. 2013년 12월 싱가포르의 남아시아계 이주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리틀 인디아 사태는 자유의지에 대한 억압의 결과가 곧 폭발임을 말해 준다. 하지만 우리 이주민정책은 이주노동자가 시장 논리에 따른 ‘인력’, 말 없는 자본의 일부가 되길 기대해 왔다. 싱가포르의 실패를 반복하려는 듯 말이다. 현행 비자제도로 다문화사회란 미래를 담아낼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취업 가능 비자 종류는 34가지다. 전문직종부터 비전문직종까지 세분화하고 일부 비자는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고 있다. 인권은 체류 자격별로 차등 ‘제공’된다. 그러다 보니 취약한 이주노동자는 사업장을 이탈하고 불법 취업하는 일이 발생한다. 복잡한 비자제도가 미등록체류를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비자제도 개편, 피할 수 없는 현실
그동안 이주민단체들은 비자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촉구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비자제도 개편 필요성에 공감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법무부는 비자제도 간소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취업비자 종류를 단순화시켜 직종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취지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이주노동자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했다. 특히 지역 실정에 맞춰 포용적인 비자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서울시는 복잡한 비자제도·절차 규제와 함께 업종제한 등 개선을 검토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비자제도 개편에 한목소리를 내는 배경에는 경제성장 둔화가 있다. 한국의 총요소생산성(TFP)이 2040년대부터 마이너스대로 진입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노동공급 장기추세를 추정할 수 있는 경제활동 참가율도 2031년부터 하락할 것이란 분석이다. 초저출산으로 경제성장의 잠재력이 저하하면서 이주노동자 고용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다. 모든 선진국이 당면한 문제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는 돈이 된다. 이민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전체 이주노동자 임금은 22조5천829억원이다. 이 중 국내에서 9조3천316억원을 지출한다. 이주노동자가 노동력 제공을 넘어 내수시장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셈이다. 바야흐로 국제사회가 이주노동자 확보 경쟁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민정책연구원은 이주노동자의 경제유발 효과는 2026년 162조원에 이를 것이라 전망했다. 충분히 매력적인 비자제도 개선은 더 이상 호혜의 문제가 아닌 경제적 유인책이다.
고용허가제 → 노동허가제 전환해야
하지만 비자 종류 통폐합을 넘어 이주노동자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인권침해 문제로 시끄러운 ‘고용허가제’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 도입이 주요한 해결 과제란 지적이다. 고용허가제는 ‘단기순환제’와 ‘정주금지’ 두 가지 원칙 내에 관리되고 있다. 단기간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주노동자를 자주 교체하겠다는 취지다. 노동자를 마치 갈아끼는 ‘부품’으로 취급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E-1~10 비자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관리하고 있으며, 이 중 비전문취업(E-9) 비자 소지자는 고용허가제 대상이다. 한편 동포 노동자(H-2·F-4)는 별도의 노동허가제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사용자의 편익과 정부의 노동력 관리 편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용허가제 내에서 이주노동자는 인간이 아닌 인력에 불과하다. 이주노동자를 사업주에 종속하게 만든다. 직업선택의 자유·가족결합의 자유·권리구제·사회보험 등 노동인권 제한이 불가피하다. 반면 노동허가제는 노동허가 기간 동안 해당 업종에 자유롭게 취업할 수 있다. 직장이동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를 없애고 노동허가제를 전면 도입하라고 소리 높인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금지협약을 준수하고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나아가 영주권과 같은 장기체류가 가능하도록 비자 제도를 완화하라고 요구한다. 현행제도는 E-9의 경우 최대 4년10개월 국내 체류를 허가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사실상 단기순환제와 정주금지 원칙을 폐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현행 점수제로 체류자격을 차등하는 비자제도룰 포함해 고용허가제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며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노동허가제를 적용하고 정주노동자로서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류 외국인 260만 시대
“이민청 신설·광역비자제도 전면 적용해야”
지난해 국내 체류 외국인은 265만명으로 10년 전 대비 47.4% 늘었다. 같은 기간 인구 대비 비율도 3.5%에서 5.2%로 커졌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입 외국인은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이주노동의 시대에서 다문화시대로의 진입이다.
시대가 바뀌면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법무부와 고용노동부로 양분된 이주노동자 정책을 통합해 이민청을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단기순환제’ ‘정주금지’ 이주민 정책은 인력 수급과 미등록체류 단속에 초점이 맞춰져, 복지·주거·차별 대응 등 정주에 필요한 인권문제는 뒷전이었다. 이에 이주노동자를 단순 ‘인력’으로 보는 현행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방위적인 ‘다문화 이주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일각에선 우선적으로 ‘광역비자’를 전면 도입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중앙정부의 하달식 이민정책을 지방분권화하자는 취지다. 이주노동자 특성이 지역별로 다른 만큼 현행 제도는 다문화 수용성 수준이 낮다는 지적이다. 하나의 방안으로 E-9과 계절근로자(E-8) 등 인력을 광역비자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이미 정부는 올해부터 광역형 비자 시범사업을 도입했고, 전북·부산 등이 해당 비자제도를 시행한다. 지역 간 이민정책 연계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특정 지역의 이주민 갈등 사례를 공유하고 지역 간 정책 정보 교환을 위한 연대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송은정 이주민센터친구 센터장은 “현재 이주노동자 정책은 사안별로 각 부처로 파편화되면서 누더기가 되고 있는 탓에 이민청을 만들어 관리와 계획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며 “일종의 ‘자리 만들기식’으로 추진되는 이민청이 아닌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총괄부처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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