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의 또는 중과실’ 인정해 징벌적 손해배상 1억원 … 손해액 5배 한참 못 미쳐
홍준표 기자 입력 2026.10.28 06:30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4년8개월이 지났다. 78년 만의 형사사법체계 대전환으로 중대재해 수사도 변곡점을 맞았다. 지난 2일 검찰청이 폐지되면서 고용노동부가 수사한 사건의 기소 여부는 이제 공소청이 가린다. 법원에서는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지난달 중대재해처벌법 첫 양형기준안을 내놓았다. <매일노동뉴스>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손솔 진보당 의원이 법무부에서 받은 235건의 공소장과 직접 입수한 1심 판결 167건을 분석했다. 공소장과 판결문 전수 분석 결과를 공개하고 중대재해 처벌의 현주소를 진단한다.<편집자>
“회사 대표가 공사 현장의 공장 지붕에 안전대 부착설비와 추락방호망이 설치돼 있지 않은 사실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음에도 공사비용과 공사기간 때문에 안전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이 이뤄지도록 한 점 등을 보면, 중대재해 발생에 관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을 인정할 수 있다.”
서울북부지법 민사9단독(권혁재 판사)이 지난달 9일 건설업체 ‘디에이치알건설’에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액으로 1억원을 주문하면서 판시한 내용이다. 2024년 4월 경북 문경의 공장 화재복구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가 13미터 높이 지붕에서 떨어져 숨졌다. 법원은 회사 대표가 지붕에 안전대 부착설비와 추락방호망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도 그대로 작업하게 했다며 경영책임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을 인정했다.
건설사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산업재해치사)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법인에는 벌금 1억원이 선고됐다. 형사 재판부는 “피해자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와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과실이 적지 않다”면서도 유족과 합의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을 참작했다. 1심 형은 확정됐다.
유족 합의에도 민사 법원은 회사의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다만 숨진 노동자의 주의의무 위반도 있다고 보고 회사 책임을 80%로 제한했다. 회사가 손해를 배상해야 할 금액은 징벌적 손해배상(1억원)과 일반적 손해배상(8천5만원)을 더해 최대 1억8천5만원(지연손해금 제외)이다. 벌금 1억원까지 포함하면 공사 도급금액인 2억8천만원과 비슷한 수준의 손해배상액이 인정된 셈이다.
‘디에이치알건설 판결’은 노동자가 일하다 숨진 사건에서 처벌로 끝나지 않고 회사에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지운 첫 사례다. 대부분 경영책임자에게 집행유예형이 선고되는 현실에서 징벌적 손해배상과 정부의 과징금이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원청 대표 실형 받았는데, 손해배상 청구 기각
27일 <매일노동뉴스>가 중대재해 사망사고 피해자 유족이 낸 민사소송 판결 4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회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한 판결은 1건뿐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15조)은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안전·보건의무를 위반해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사업주나 법인·기관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5배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배상하도록 정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4년8개월이 지났지만, 민사 손해배상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법원도서관 등을 통해 확인된 사건만 알려졌을 뿐이다. 중대재해를 일으킨 사업주나 법인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도록 한 입법취지가 실제 작동한 사례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법원 관계자는 손솔 진보당 의원에게 “민사소송 사건은 특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본지가 확인한 민사 판결문을 보면 대부분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약관과 공동수급 협약서 등 사전에 맺은 계약이 발목을 잡았다. 2022년 3월 대전의 ‘동일스위트’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하청노동자가 비계에서 떨어져 숨진 사건과 관련해 재해자 자녀 1명이 하청이 근로자재해공제계약을 체결한 공제조합을 상대로 징벌적 손해배상 1억원을 청구했다. 원청 동일스위트 대표는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형사 법원 1심은 지난해 8월 동일스위트 대표에게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법인에는 벌금 1억원을 부과했다.
그런데 민사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올해 2월 유족의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고 일반 손해배상 3천300만원만 인정했다. 공제조합의 약관이 문제가 됐다. 중대재해처벌법상 ‘고의·중과실 의무 위반’이 손해배상의 요건인데, 공제조합 약관에는 “고의·중과실 법령 위반에 관해 손해를 보상하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재판부는 “피고의 공제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유족이 공제조합이나 보험사가 아닌 사업주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해야만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공동수급인’ 들어 원청 손배 책임 부정
‘도급 형태’로 손해배상 책임이 부정된 케이스도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2일 만인 2022년 2월8일 일어난 사고다. 경기도 성남 판교의 신축 현장에서 승강기 설치업체 대표와 직원이 승강기와 함께 약 83미터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승강기 설치업체와 계약을 맺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책임자와 법인은 중대재해처벌법 혐의로 송치됐지만, 아직 검찰(현 공소청)이 수사하는 상태다.
유족이 현대엘리베이터를 상대로 낸 민사 사건에서는 손해배상 책임 주체가 쟁점이 됐다. 법원은 지난달 15일 유족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현대엘리베이터와 승강기 설치업체가 사고 전 체결한 협약서에 ‘상호 동등한 계약당사자의 지위’라고 기재된 부분이 문제였다. 재판부는 두 업체를 ‘공동수급인’으로 판단했다. 하도급 계약이 아니라서 현대엘리베이터에 ‘도급인의 안전조치의무(산업안전보건법 63조)’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판단 없이 위자료만 인정된 판결도 나왔다. 2022년 5월 충남 천안의 창고 신축 현장에서 발생한 재하청 일용직 노동자 추락사와 관련해 1심은 지난해 2월 원청인 ‘다움종합건설’ 대표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유족 합의와 재발방지 노력이 형량을 깎았다. 법인 벌금은 1억원에 그쳤다.
유족은 합의했지만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재해자 아들이 원청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 1심은 지난해 6월 위자료 4천500만원만 인정했다. 민사에서도 피해자 과실이 인정돼 원청·재하청의 책임은 75%로 제한됐다. 법원은 원청이 낸 형사합의금 1억5천만원과 재하청이 낸 합의금·공탁금 3천500만원도 대법원 판례에 따라 재산상 손해배상금의 일부로 봤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정한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판단은 아예 없었다.
벌금 상한 2% 수준, 영업이익 5% 과징금 ‘주목’
징벌적 손해배상은 벌금형보다 강력한 제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미미한 수준이다. 민사 판결을 확인한 세 곳의 건설사(디에이치알건설·동일스위트·다움종합건설)에 선고된 벌금은 모두 1억원이었다. 법정형 벌금 상한(50억원)의 2%에 그친다. 하지만 디에이치알건설을 제외한 나머지는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 자체가 인정되지 못했다. 경미한 벌금형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일까지 선고된 1심 판결 167건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유죄를 받은 법인 142곳의 벌금 중앙값은 7천만원이었다. 벌금 5억원 이상은 4곳뿐이다.
유족 합의로 형량이 줄거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 판결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과징금’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는 이유다. 국회는 지난 1일 노동자 반복 사망사고가 발생한 사업주에게 영업이익에 비례해 과징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최근 1년간 안전·보건조치 위반으로 발생한 산재로 노동자 3명 이상이 사망한 경우 해당 사업주에게 영업이익의 5%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과징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내년 4월28일부터 시행되고, 개정법 시행 이후 발생한 사망사고에 적용된다.
실제 같은 유형의 사망사고가 되풀이된 기업은 200개에 가깝다. 이들 기업에서 1년에 3명 이상 숨지면 과징금 대상이 될 수 있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노동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6월2일까지 같은 유형 사망사고가 되풀이된 182개 기업에서 사망사고 687건이 발생했다. 기업별로는 현대건설이 28건으로 1위였다. 대우건설(24건), DL이앤씨·롯데건설·포스코이앤씨(각 19건), GS건설(18건)이 뒤를 이었다. 노동부는 올해 8월 동일유형 반복재해 기업을 ‘핀셋 집중관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업규모 맞춘 과징금, 재발방지노력 반영 우려
노동부는 27일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을 공포하면서 “과징금은 ‘위반행위 횟수, 기업의 규모, 사망한 근로자의 수’ 등에 따라 산정된 금액을 기준으로 ‘위반행위의 내용 및 정도, 전체 근로자수 대비 사망한 근로자수의 비율, 산업재해의 예방 및 재발방지에 필요한 조치 이행을 위한 노력의 정도’와 같은 가중·감경 요소를 고려해 부과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과징금 부과 절차와 징수 시기를 결정하는 과징금심의위원회 설치·운영 방안도 의견 수렴을 거쳐 하위법령에서 구체적으로 정할 계획이다.
실질적인 과징금 부과의 관건은 하위법령에 달렸다. 노동부가 ‘재발방지 노력’을 감경요소에 포함시킨 부분이 논란이 될 여지가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형사 사건에서 1심 유죄 판결의 58%(150건 중 87건)가 재발방지·안전조치 개선을 유리한 정상으로 들었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정한 중대재해처벌법 15조는 배상액을 정할 때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노력의 정도’를 고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내년 1월 법 시행 5년을 맞고, 3월에는 양형기준 최종 의결이 예정돼 있으며, 4월에는 과징금이 시행된다. 경미한 처벌 관행의 ‘빈틈’을 징벌적 손해배상과 과징금이 메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권오성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22년 양형위원회 용역 발제문에서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의무를 위반한 법인 벌금이 1천만원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범죄억지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권영국 변호사(법무법인 두율)는 “형사처벌의 한계를 고려할 때 사업주에게 경영상 부담을 줄 수 있는 경제적 제재를 병행적으로 고려해 볼 만하다”며 “그러나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우리나라 법원의 ‘새가슴 판결’로는 턱도 없다. 사전 예방비용을 뛰어넘는 실질적인 징벌적 수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도록 제도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현행법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의 하한과 산정 기준을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규모에 맞춘 과징금 부과로는 실제 기준보다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법원 양형위원인 김혜경 계명대 교수(경찰행정학)는 올해 1월 논문에서 기업 규모에 맞춰 벌금을 정하는 영국 기준의 한계를 예로 들면서 “양형지침보다 훨씬 낮은 벌금액과 기업의 경제규모 변동에 따른 벌금액은 예측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s://www.labortoday.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