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0 09:19
하늘과 땅이 연대하는 그곳에서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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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구센터
 조회 :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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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노동민주주의의 현주소
한국 산업구조의 민낯 드러내다
2022년 10월,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한국 산업구조의 민낯을 드러냈다. LCD 편광필름을 생산하는 이 공장은 일본 니토덴코가 지분을 가진 외국인투자기업으로, 2003년 11월 경북 구미 4공단 외국인투자지역에 입주하면서 구미시로부터 토지 50년 무상임대와 법인세·취득세 감면 특혜를 받았다. 직원 700명에 연 매출 1조원를 달성하기도 했던 이 기업은 생산품의 90%를 구미 LG디스플레이에 납품하는 핵심 협력업체였다.
그러나 2018년과 2019년, 회사는 구미 LG디스플레이의 구조조정을 이유로 대규모 인력감축을 단행했다. 생산직 500여명 중 430여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남은 노동자들로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연 매출 4천억원에 순이익 260억원의 성과를 냈다. 2022년 4월에는 코로나로 인한 중국 공장 폐쇄로 구미공장 생산량이 증가하자, 회사는 100명 신규채용과 고용안정을 약속했고 노조는 이를 믿고 회사가 제시한 임금안을 수용하며 2022년 교섭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 모든 약속은 2022년 10월4일 발생한 화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회사는 화재 발생 한 달 만에 1천300억원의 화재보험금을 받았는데도 공장 재건을 거부했고, 노동자들과의 어떠한 협의도 없이 일방적인 청산을 결정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후의 행보였다. 회사는 구미공장의 생산물량을 평택의 한국니토옵티칼로 이전하고 그곳에서 30명의 신규 인력을 채용하면서도, 구미공장 노동자 고용승계는 완강히 거부했다. 심지어 희망퇴직을 거부한 17명의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이는 한국의 산업구조가 지닌 근본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외국인투자기업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혜택을 받으면서도, 수익성이 떨어지면 언제든 노동자들을 저버리고 떠날 수 있는 구조적 특권을 누리고 있다. 더욱이 원청기업인 LG디스플레이는 자신들의 물량을 생산하던 하청업체가 일방적으로 폐업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상황에서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이는 글로벌 자본이 한국의 취약한 노동법과 산업구조를 활용해 어떻게 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한국의 산업구조가 지닌 구조적 취약성, 즉 외국자본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 원·하청 관계의 불균형성, 그리고 노동자 권리 보호 미흡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더불어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쉽게 이윤 논리에 밀려날 수 있는지,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쉽게 기업의 일방적 결정에 희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옵티칼 노동자 400일 투쟁의 힘
필자가 공저자 이병훈 중앙대 교수와 함께 2017년에 발표한 "불안정노동자 투쟁의 성공 조건" (Winning Conditions of Precarious Workers' Struggles: A Reflection Based on Case Studies from South Korea) 논문은 불안정노동자 투쟁의 승리 조건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연구다. 1998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에서 발생한 30개의 주요 불안정노동 투쟁 사례를 체계적으로 검토해 ‘성공한 투쟁’의 결정조건들을 도출했다.
연구 결과는 불안정 노동자 투쟁의 성공을 위한 세 가지 핵심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정규직과의 강력한 내부 연대(internal solidarity)로, 이는 분절화된 노동시장에서 서로 다른 고용형태를 가진 노동자들 간의 계급적 연대를 의미한다. 둘째는 시민사회와 외부 노동조직의 적극적 연대(external solidarity)로, 투쟁이 사업장을 넘어 사회적 의제로 확장될 때 승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는 효과적으로 집중된 투쟁 레퍼토리(focused protest repertoires)로, 이는 다양한 투쟁 방식의 무분별한 동원보다 전략적으로 집중된 투쟁이 더 효과적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 중 두 번째 조건이 가장 강력했는데, 현재 진행 중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의 투쟁에 큰 함의를 제공한다. 투쟁에서 이기려면 시민사회와 외부 노동조직, 언론 및 정치권에서의 광범위한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2025년 1월의 '옵티칼 희망텐트촌'에서 보여준 시민 500여명의 연대, 국회의원 96명의 고용승계 촉구 성명,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이어지는 자발적 선전전은 바로 이러한 연대의 구체적 실천이며 투쟁 승리의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이 연구는 투쟁의 성공이 단순히 노동자들의 의지나 투쟁 강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승리는 노동자·시민사회·정치권이 함께 만들어 가는 복합적인 연대의 산물이다. 이는 현재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두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승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더욱 강력하고 지속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먹튀방지법 제정과 원청의 사회적 책임 이행
물론 연대만으로는 부족하다. 외국인투자기업의 무책임한 철수와 노동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먹튀방지법’ 제정은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이 법은 국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은 외국인투자기업의 일방적 사업장 폐쇄와 고용 조정을 규제하는 법적 근거가 될 것이다.
동시에 원청기업인 LG디스플레이의 책임도 엄중히 물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원청기업이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운명을 외면하는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다. 공급망 실사 의무화를 통해 원청기업이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인권보호에 실질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400일이 넘는 시간, 두 여성노동자는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정의를 외치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 시대 노동권과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묻는 절실한 질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이 질문에 하늘과 땅이 만나는 연대로 답해야 한다. 고립된 투쟁이 시민들의 연대와 만나고,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각성과 만나고, 절망적 현실이 변화의 희망과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박정혜·소현숙 두 노동자는 하늘 위에서 외치고 있지만,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들의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우리의 연대는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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