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비스업 노동자 10명 중 4명 "고객에게 폭행당했다"800만 감정노동자 '업무 중 스트레스' 무방비 노출 … "국회에서 사회적 합의 이끌어야"
점심식사 후 매장에 돌아왔더니 동료 직원이 무릎을 꿇고 있더라고요. 그 옆을 지나가던 저에게 반말이 날아왔습니다. "너도 꿇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이미 무릎을 꿇고 있던 동료가 "미안해 일단 좀 꿇어 줘" 하고 말하더군요. 제가 봉변을 당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항의하던 고객과 제 눈이 마주쳤다는 거였죠. 그 손님은 연신 "내가 이쪽 쳐다보지 말랬지"라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료 직원 다섯 명이 그 손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면세점 노동자 A씨)
병원이라는 곳이 항상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이 못 돼요. 아픈 분들에게 해맑게 웃으면 비웃냐고 하는 경우도 있고, 심각하게 있으면 환자 겁주냐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제 딴에는 친절하게 하려고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하고 물었는데 "아파서 왔는데 왜 실실 쪼개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병원 원무행정 노동자 B씨)
서비스 노동자들 감정노동 심각 … 폭행·성추행 노출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가 26일 공개한 '감정노동 수기집-경험사례 모음' 책자에 담긴 노동자들의 증언 중 일부다. 정부가 일자리정책 5년 로드맵에 감정노동자 보호법 제정을 명시하면서 직무스트레스로 고충을 겪고 있는 감정노동자의 노동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날 서비스연맹이 공개한 서비스산업 감정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서비스산업 노동자 10명 중 4명이 고객에게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대형마트·백화점·면세점·호텔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 2천8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다. 서비스업 노동자들은 폭행 이외에도 폭언(12.2%)·괴롭힘(6.7%)·성희롱(3.6%)에 노출돼 있다.
감정노동 정도도 심각했다. 상황에 따라 매우 그렇다(1점)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4점)를 표시하라고 주문하고 평균을 냈더니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질문과 관련한 점수가 1.45점으로 나왔다.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고객응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직장 안에 해결하는 절차가 없다"는 문항 점수는 1.49점을 기록했다. 극심한 감정노동을 하는데도 공식적인 해소 방법은 없다는 의미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건의료노조가 사회건강연구소에 의뢰해 보건의료 노동자 1천525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실태를 조사했더니 환자나 보호자에게 물리적 폭력을 당했다는 비율은 27.7%, 성추행을 당했다는 비율은 15.1%였다.
농협중앙회가 실시하는 고객만족(CS) 평가로 농·축협 노동자가 심각한 감정노동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이날 함께 공개됐다. 농협중앙회는 2008년부터 외부업체를 통해 CS 평가를 하고 있다. CS 점수를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종합점수가 낮은 지역 농·축협을 공개하기도 한다. 협동조합노조가 조합원 1천48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조합원 75%가 '감정조절 요구 및 규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이로 인해 우울감을 호소하는 노동자도 16.5%나 됐다.
"보호법안 제정으로 사회적 합의 물꼬 터야"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에 따르면 이 같은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800만명에 이른다. 감정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부는 노동자들이 업무 중 받는 정신적 상처를 예방하기 치료하기 위한 대책을 올해 안에 발표할 계획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도 감정노동자를 정의하고, 이들의 인권과 건강장해에 대한 보호방안을 마련하는 내용의 감정노동자보호법안이 계류돼 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11월 정기국회서 해당 법안이 제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과도하게 자기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고객과 공정하지 못한 소비자정책을 펼치는 기업 틈 속에서 감정노동자들은 사회적 지지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며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감정노동자보호법안의 조속한 통과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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