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노위 합의문 도출] ‘깜깜이’ 근로자대표제 선출절차 바뀐다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뽑고 임기·지위보장 규정 … “근기법 개정·특별법 제정 중 선택”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한 A씨는 출근 당일 희망퇴직자 면담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근로자대표가 경영상 필요에 의한 정리해고를 합의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누구인지도 몰랐던 근로자대표는 회사가 임명한 영업부장이었다. 영업부장과 경영진이 해고자 선정기준을 정하고, 희망퇴직자 명단을 확정해 정리해고를 추진했다.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노조는 지난 4월 회사에서 올해 임금조정 협의완료 통보를 받았다. 노사협의회인 한마음협의회와 올해 임금조정을 완료했으니 노조 조합원에게 동일하게 적용할지 여부를 회신해 달라는 요구였다. 당시 노조는 회사와 올해 임금교섭을 두 차례밖에 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유령 근로자대표제’ 피해 사례와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노조가 최근 겪은 사건이다. 노조가 없는 90% 가까운 사업장에서 근로자대표는 노조를 대신해 노동자 해고나 노동시간·휴게시간을 결정한다. 이렇게 근로자대표를 사용자와 합의·협의 주체로 명시된 노동관련법만 7개다.
<표 참조> 권한은 막강하지만 사실 선출절차를 비롯한 책임범위나 운영방식을 명시한 법 규정이 없다. 회사가 지명하는 이가 근로자대표가 돼 고용·노동조건 주요사항을 결정하거나, 노조활동을 제약하는 사용자의 무기로 악용되는 일은 자주 발생한다. 노사정이 이처럼 법령미비 상태에 있는 근로자대표제도를 개선하기로 합의했다. 근로자대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첫걸음을 뗐다는 평가다.
노사 탄력근로제 문제로 논의 시작
18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6일 경사노위 의제별위원회인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가 발표한 근로자대표제도 개선에 관한 노사정 합의문은 노사 만장일치로 나왔다. 제도개선 필요성에 노사 모두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는 얘기다.
노사협의회는 1963년 노동조합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정 전 법)이 개정되면서 사업장에서 필수적으로 설치·운영됐다. 이 법에는 노사협의회 대표자가 단체교섭권의 대표권을 위임받는 자로 규정돼 있다. 노조위원장 권한을 부여한 셈이다. 이후 노사협의회는 노조와 단체교섭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특히 1997년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근로자대표는 경영상 해고시 협의, 근로시간제도 유연화에 관한 서면합의 등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근로자대표와 관련한 규정은 없고 다만 고용노동부 지침으로 “과반수노조가 있는 경우 그 노조, 없는 경우 근로자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로 해석되고 있을 뿐이다. 권한은 많은데 선출절차는 규정돼 있지 않으니 사용자는 악용의 유혹에 노출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 30명 이상 사업장 586곳을 조사한 결과 노사협의회를 운영하는 335곳 중 근로자위원을 회사가 지명하는 경우가 13.4%나 됐다. 사용자가 개입할 여지가 큰 간접선거 방식은 11.0%였다. 노동자 직접선거로 근로자위원을 선출하는 경우는 47.5%, 노조(과반수노조)가 근로자위원을 지명하는 경우는 11.9% 수준이었다.
근로자대표제 개선은 지난해 2월 경사노위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내용의 노사정 합의문을 도출한 뒤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2018년 7월부터 공공기관과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시행한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도입 후 재계 불만이 빗발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합의가 나왔다.
경사노위 합의는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노조가 없거나 약한 사업장에서 근로자대표제를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노동계와 전문가들 사이서 높았기 때문이다. 실제 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10~11월 5명 이상 사업장 2천436곳의 유연근로제도 실태조사 결과 탄력근로제를 근로자대표나 과반수노조와 합의하지 않았거나(57.7%), 개별 합의(12.8%)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근기법에서 허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도입한 경우가 70.5%나 됐다.
이 때문에 한국노총은 “현 근로자대표제로는 절대 탄력근로제 확대를 허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지난 16일 근로자대표제 개선 합의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기대하는 재계와 제도 보완을 요구했던 한국노총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나온 셈이다.
근로자대표 선출·임기·권한 구체화
위반시 처벌 문제는 ‘입법부’ 몫으로 남겨
경사노위의 이번 합의는 크게 세 축으로 구성돼 있다. 근로자대표의 선출, 근로자대표의 임기, 근로자대표의 지위·활동을 규정했다. 우선 과반수노조가 있는 경우 노조에 근로자대표 지위를 인정한다. 과반수노조가 없고 노사협의회가 있는 경우에는 노동자의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선출된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들이 ‘근로자위원 회의’를 구성해 근로자대표 지위를 가진다. 사용자의 개입 여지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과반수노조와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이 모두 없는 경우에는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근로자대표를 선출한다. 노사정은 합의문에 “근로자대표 선출 과정에 대한 사용자의 개입이나 방해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근로자대표 임기는 3년으로 한다. 노사가 합의하면 3년 이내로 정할 수 있다.
근로자대표에게는 권한과 의무를 같이 부여했다. 고용형태·성별 등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도록 당사자 의견을 청취하도록 했고 활동에 필요한 자료를 사용자에게 요구할 수 있게 했다. 사용자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실히 요구를 이행해야 한다. 또 서면합의 체결·이행과 관련한 고충 해결을 위해 노동자·사용자와의 협의를 사용자에게 요구할 수 있다. 근로자대표 활동 시간은 일한 것으로 본다.
합의는 노사가 각각 한 발씩 물러나면서 이뤄졌다. 한국노총은 논의 과정에서 근로자대표제 개선과 노동이사제·노사공동결정제 도입을 위한 노동자(근로자)경영참가법 제정을 요구했다. 한국경총은 근로자대표에게 취업규칙 변경 권한을 부여하고, 사업장 내 부서별·업종별 근로자대표가 해당 부문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합의문에 모두 빠졌다. 다만 사용자 처벌규정은 문구에 담지는 않았지만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이뤘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2본부장은 “중요한 근로자대표제 개선 원칙과 방향을 합의한 것이고 실효적 조치와 관련한 논의는 향후 과제로 남았다”며 “구체적 제재나 처벌방안은 입법부에 위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사노위 관계자는 “논의 중 노동부도 처벌 조항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정부·여당 논의 과정에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경사노위 합의로 공은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관련 근기법 개정안과 함께 입법 논의가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인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자대표제는 노동관계법 7개 법률의 36개 조항에 권한이 망라돼 있다”며 “개정 형식을 근기법으로 할 것인지, 특별법으로 할지는 정부와 국회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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