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및 지명유래

남목1동 행정복지센터

history

  • 남목1동사무소 신축 이전 개소(현 서부동 522-1)2002. 12. 30
  • 2001. 02. 17남목1동 주민자치센터 개소
  • 울산광역시 동구 남목1동(울산광역시 승격)1997. 07. 15
  • 1995. 03. 02남목1동 → 남목1ㆍ3동으로 분동
  • 울산시 동구 남목1동(동구청 승격)1988. 01. 01
  • 1979. 01. 01울산시 남목1ㆍ2동으로 분동
  • 울산시 남목동1972. 10. 01
  • 1962. 06. 01울산시 방어진출장소 동부, 서부, 미포리
  • 방어진읍 동부, 서부, 미포리로 칭함.1936.
  • 고종갑오년동면 남목(동부리, 서부리, 미포리)
  • 남옥(南玉)조선초

서부동(西部洞) 지명유래

서부동은 앞불내(南木川)라는 이름으로 이미 조선 초부터 등장하며, 예종 1년(1469)에는 적진리(赤津里)라 하였다. 그후 정조 때는 남옥리(南玉里)와 한채리로 갈라졌다.그후 고종 31년(1894)에는 옥류천 동쪽을 동부동, 그 서쪽을 서부동이라 하였다. 한편한채리는 대편동(大便洞)으로 고쳤다가 다시 대편동(大片洞)이라 하였다. 일제 시대인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서부동과 대편동을 합쳐서 서부리라 하였다. 이곳은 울산 목장의 감목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동부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전까지동구 지역에서 가장 중심지 였다.

산, 바위, 들

  • 학인산 : 마골산 아래 노송들이 숲을 이룬 곳에 학이 둥지를 른 곳을 말한다.
  • 제기들 : 목장에서 기르는 말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도록 기원하는 제사를 1 년에 한번씩 지냈다고 한다. 당시 제사를 지내던 제당(祭堂) 근처의 논과 밭을 '제기들' 이라 하였다.
  • 동뫼 : 제기들 가운데 있는 동산을 '동뫼'라 하였다. 바로 옆에 '큰동뫼'도 있었다.
  • 고사집터 : 남목초등학교 아래로는 논밭이 있었고, 이 들의 가장자리 한 곳에 상여 를 보관해 두는 곳이 있었다. 이 상여는 송정계(松正契)에서 관리하였다. 우리 고 장에서는 옛날부터 여러 종류의 친목계가 조직되어 상여, 연자방아, 제당 등을 관리·운영하여 왔다. 대표적인 친목계로는 동계(東契), 서계(西契), 송정계(松正契), 화정계(華亭契) 둥이 있어 200년의 전통을 이어왔다.

남목목장

현재 울산 동구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현대중공업을 들지만, 옛날 이 지역을 상징했던 것은 목장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목장과 관련된 것이 많다. 이 지역 목장의 지휘 본부가 있었던 곳이 서부동이다. 그리고 그 관리 책임자를 감목관이라 했는데 6품 벼슬이었다. 조선 시대 울산 지역은 모두 도호부의 관할하에 있었지만 목장 관내에 있는 목민들을 지배하는 권한은 감목관에게 있었다. 목민들은 물론이고 목자나 목장의 둔전을 경작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목장의 역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산부의 역을 2중으로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남목 목장을 '울산 목장' 혹은 '방어진 목장'이라고도 하였다. 이 지역 통치권자인 감목관의 관아가 있었던 남목1동 사무소 자리에는 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목조건물이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 다만 이곳에는 두 개의 선정비(善政碑)가 남아있어 이곳이 관아 자리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선정비 가운데 하나는 '목관변공정엽청덕선정비(牧官卞公廷嬅淸德善政碑)' 이고, 다른 하나는 '감목관윤공졸선정비(監牧官尹公拙善政碑)' 이다.

골짜기, 고개

  • 질마재 : 현대고등학교를 병풍처럼 에워싼 뒷산의 모습이 소등에 짐을 싣는 길마 를 닮았다고 해서 길마산(草安山)이라고도 했는데, 이 길마산 고개(길마재)의 구 개음화한 경상도 방언이 '질마재'이다. 이 길은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울산장터 를 넘나들던 지름길이었다. '질마재'는 현대고등학교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 불당골(佛堂谷) :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열암사(裂岩寺)가 이 골짜기에 있어서 '불당골'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나 여겨진다. 주거지에서 1Km 정도 산길을 오르면 자연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이 아직 남아 있으며, 그 주위로는 깨어진 기와장이 널려 있다. 또한 이 골짜기에는 만승폭포가 있어 경치가 매우 좋았던 곳이다.
  • 비석골 : 당고개(일명 남목고개) 일대의 골짜기를 '비석골'이라 한다. 이 비석골 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황경(黃驚)의 선정비이고, 또다른 하나는 열 녀비이다. 이 가운데 황경은 남목의 목관이면서도 농정에 힘을 쏟아 이 지방 사람 들로부터 칭송받은 인물이다. 원래 남목 지방은 지하에서 솟아나는 찬물과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너무 차가워서 벼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발견한 황경은 도랑을 깊이 치도록 하여 풍년이 들게 하였다고 한다.
  • 새밭재(烏田嶺) : 동축사에서 염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온갖 새들이 숲속에 서 둥지를 틀고 살았으므로 '새밭재'라 하였다. 지금의 산불 감시 초소와 헬기장이 있는 곳이다.
  • 당고개 : 흔히 우리가 '남목 고개'라고 부르는 고개로 동구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고개 꼭대기에 있는 주유소 근처의 성황당에는 오래된 고목 나무와 돌무템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 삼밭골 : 현재 현대여자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첫날 이곳은 삼밭(麻田)이 었다. 원래 이 지방에서는 삼이 많이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골산' 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현대중공업의 숙소 가운데 하나인 '삼전관'도 '삼맡골'에서 따온 것이다.
  • 기타I (골짜기) : 부안이논골(남목2동 산동네), 가사골, 범다라맨골, 무적골(水積 谷), 배낭골(배나무골), 촛대골, 대추나무골, 논골, 삼셋등, 국먼디, 화살등대, 배약 골, 큰골 등이 있다.
  • 기타 B(바위) : 장수살구돌, 투구 바위, 벼락돌, 미역돌, 송곳바위, 고동바위, 메뚜 깔돌, 솔돌(가마돌), 취양돌(남바위), 갑옷바위 등이 있다.

동부동(東部洞) 지명유래

동부동은 앞불내(南木川)라는 이름으로 이미 조선 초부터 등장하며, 예종 1년(1469)에는 적진리(赤津里)라 하였다. 그후 정조 때는 남옥리(南玉里)라 하였고, 고종 31년(1894)에는 옥류천(玉流川) 동쪽을 동부동이라 하여 비로소 그 이름이 처음 시작된다.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도 동부동이라 하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는 동부리라 하였다.

자연부락

  • 동부리 : 옥류천과 울산 목장 감목관 관아의 동쪽 마을로 지금의 남목3동에 해 당한다. 옛날 관아를 중심으로 동부동과 서부동으로 구분하는 예는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다.
  • 쟁골(瓦谷) : 동부동 동쪽 끝의 작은 골짜기로 질그릇과 기와를 굽던 곳이었다. '쟁'은 '기와'의 방언이다. 그리고 이곳 언덕에는 4백년이 넘은 회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이곳을 장수나무 뻔디기라 하였다.
  • 성골(城谷)마을 : 조선시대에 마성(馬城)이 있었다 하여 성골이라 하였다. 새평 마을의 북쪽에 있었는데, 6·25를 전후한 시기의 빨치산 난동 때문에 아랫마을로 집단 이주하였다.
  • 장승백이 : 동부리 입구에 세워진 것으로, 옛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경기·충청 지방에서는 장승, 호남 지방에서는 벅수, 제주지방에서는 하루방이라 하였다. 동부리의 장승도 남목파출소 자리에 있었다.
  • 큰내마을 : 동부동과 미포동 한채 마을 사이의 옥류천 가에 있었던 5~6집 정도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비가 많이 오면 산길을 돌아 피신했는데 지금의 현대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산과 시내

  • 톳재이산 : 새평 마을과 주전동 사이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는 산길이 있었으나 사람의 왕래가 뜸했다. 그리하여 한적한 산길에 도깨비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들재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톳재이'는 도깨비의 이 지방 방언이다.
  • 관비알산 : 과녁이 설치되었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근세까지만 하더라 도 많은 사격 연습이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나무는 물론 풀 한포기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졌으며, 능선에는 이 지방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마성(馬城)이 남아 있다. 지금의 동부 패밀리 아파트 동쪽산이다.
  • 촉산(矗山) : 감나무골의 옥류천 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 산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동축사에서 내려다 보면 발아래 잡힐 듯이 솟아 있었던 산이다. 마치 팽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이 사면이 가파르게 생겨서 비록 150m밖에 안되지만 정상까지 오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산이었다. 이렇게 가파른 경사를 이룬 산이다 보니 화목(火木)을 연료로 했던 지난날에도 항상 소나무가 무성하였다. 그리하여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이면 수려한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가위 절경을 이루었다. 이 산의 정상부분은 횐색의 바위로 이루어져 목련꽃같이 하얗게 빛났으며, 이것은 자하(紫霞)빛을 띈 주변경관과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절경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그 아름답던 촉산의 풍광은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에 현대 하이야트 아파트와 남목 그린타워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옥류천, 옥류교 : 동축사가 있는 마골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남목초등학교 옆으 로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하고, 이 개울을 건너던 다리를 옥류교라 하였다. 혹은 동천내, 동천 다리라고도 불렀다. 이 시내를 『동국여지승람』에는 '남목천(南 木川)'이라 하였다. 현재 개울 상류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하류는 모두 복개되어 옛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골짜기, 들

  • 원안계 : 동부동의 남쪽 들로서 옥류천 제방 안쪽에 있었던 논들이다.
  • 홍문들, 대문안들 : 옛날 남목에는 홍살문이 있었고, 이 홍살문 앞들을 홍문들이라 했다. 그리고 홍살문 안에 있는 들판을 '대문안들'이라 하였다. 지금의 한국프랜지 주변을 말한다.
  • 돌안골, 목골새(沐谷沼), 물탕골 : 이 골짜기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 하여 도 룡골(跳龍谷)이라 하였는데, 변음되어 돌안골이 되었다. 이 골짜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목골새라는 소(沼)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아래로 흘러 옥류천과 합류하였는 데 이곳이 물탕골이며, 여기서 미포동의 갯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지금의 동부 패 밀리 아파트 일대이다.
  • 감남골(枾木谷) : 동부동의 가장 북쪽 골짜기로 옛날에 감나무가 많다 하여 감나 무골이라 했는데, 줄여서 '감남골'로 부르게 되었다.
  • 숲안(林內) : 옛날 남목과 바다를 차단하기 위해 옥류천 제방에 미루나무를 빽빽 하게 심었는데 그 안쪽을 숲안이라 하였다.
  • 층계돌, 도린작, 절골짝 : 감남골에서 동축사로 오르는 돌계단을 '충계돌'이라 하 며, 이 일대의 골짜기를 도린작이라 한다. 그리고 절 밑에 있는 약수터 일대를 '절골짝'이라 한다.
  • 서당비알 : 서당이 있었던 산비탈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남목초등학교 근처다.
  • 범밭재, 범굴골 : 호랑이가 출몰했던 고개라 하여 '범밭재'라 했는데, 주전·강동·어물리 사람들이 울산장을 오갈 때 이 길을 이용하였다. 이 근처의 골 짜기를 '범굴골'이라 했으며, 여기에 호랑이를 잡기 위한 포수막이 있었다.
  • 두꺼비 바위(蟾岩) : 동축사 뒤에 육중하게 솟아있는 바위들 가운데 맨 위에 있 는 큰 바위가 두꺼비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는 남목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관일대(觀日臺)라고도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남목의 감목관이었던 원유영(元有永)이 쓴 '부상효채(扶桑曉彩)'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 기타 : 학다골, 쌍직골(雙直谷), 모번디기(묘지언덕), 몸밭골, 능구렁이골, 소직골, 음턱골, 악다(岳多)뻔디기, 검은 돌배이(黑端), 밤나무밭, 도둑놈모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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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 2023-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