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주전동과 통합(법정동 : 동부동, 주전동)1998. 10. 01
- 1997. 11. 20남목3동 주민센터 신축이전(현위치)
- 남목동 → 남목1ㆍ3동(동부동 전역)으로 분동1995. 03. 02
- 1979. 01. 01남목동 → 남목1ㆍ2동(서부동 300번지이하)으로 분동
- 남목동(동부동, 서부동 통합)1972. 10. 01
- 1964. 04. 01동부동, 서부동으로 개칭하였음
- 방어진출장소 동부리, 서부리, 미포리(법률 제 1068호1962. 06. 01
- 1936. 07. 01방어진읍, 동부, 서부, 미포리로 칭함.
- 동면 면소재지 서부리에 위치1910. 10. 01
- 고종갑오년동면(동부리, 서부리, 미포리)
- 남목조선초
동부동(東部洞) 지명유래
동부동은 앞불내(南木川)라는 이름으로 이미 조선 초부터 등장하며, 예종 1년(1469)에는 적진리(赤津里)라 하였다. 그후 정조 때는 남옥리(南玉里)라 하였고, 고종 31년(1894)에는 옥류천(玉流川) 동쪽을 동부동이라 하여 비로소 그 이름이 처음 시작된다.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도 동부동이라 하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는 동부리라 하였다.
자연부락
- 동부리 : 옥류천과 울산 목장 감목관 관아의 동쪽 마을로 지금의 남목3동에 해 당한다. 옛날 관아를 중심으로 동부동과 서부동으로 구분하는 예는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다.
- 쟁골(瓦谷) : 동부동 동쪽 끝의 작은 골짜기로 질그릇과 기와를 굽던 곳이었다. '쟁'은 '기와'의 방언이다. 그리고 이곳 언덕에는 4백년이 넘은 회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이곳을 장수나무 뻔디기라 하였다.
- 성골(城谷)마을 : 조선시대에 마성(馬城)이 있었다 하여 성골이라 하였다. 새평 마을의 북쪽에 있었는데, 6·25를 전후한 시기의 빨치산 난동 때문에 아랫마을로 집단 이주하였다.
- 장승백이 : 동부리 입구에 세워진 것으로, 옛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경기·충청 지방에서는 장승, 호남 지방에서는 벅수, 제주지방에서는 하루방이라 하였다. 동부리의 장승도 남목파출소 자리에 있었다.
- 큰내마을 : 동부동과 미포동 한채 마을 사이의 옥류천 가에 있었던 5~6집 정도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비가 많이 오면 산길을 돌아 피신했는데 지금의 현대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산과 시내
- 톳재이산 : 새평 마을과 주전동 사이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는 산길이 있었으나 사람의 왕래가 뜸했다. 그리하여 한적한 산길에 도깨비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들재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톳재이'는 도깨비의 이 지방 방언이다.
- 관비알산 : 과녁이 설치되었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근세까지만 하더라 도 많은 사격 연습이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나무는 물론 풀 한포기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졌으며, 능선에는 이 지방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마성(馬城)이 남아 있다. 지금의 동부 패밀리 아파트 동쪽산이다.
- 촉산(矗山) : 감나무골의 옥류천 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이 산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동축사에서 내려다 보면 발아래 잡힐 듯이 솟아 있었던 산이다. 마치 팽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이 사면이 가파르게 생겨서 비록 150m밖에 안되지만 정상까지 오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산이었다. 이렇게 가파른 경사를 이룬 산이다 보니 화목(火木)을 연료로 했던 지난날에도 항상 소나무가 무성하였다. 그리하여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이면 수려한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가위 절경을 이루었다. 이 산의 정상부분은 횐색의 바위로 이루어져 목련꽃같이 하얗게 빛났으며, 이것은 자하(紫霞)빛을 띈 주변경관과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절경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그 아름답던 촉산의 풍광은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에 현대 하이야트 아파트와 남목 그린타워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옥류천, 옥류교 : 동축사가 있는 마골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남목초등학교 옆으 로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하고, 이 개울을 건너던 다리를 옥류교라 하였다. 혹은 동천내, 동천 다리라고도 불렀다. 이 시내를 『동국여지승람』에는 '남목천(南 木川)'이라 하였다. 현재 개울 상류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하류는 모두 복개되어 옛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골짜기, 들
- 원안계 : 동부동의 남쪽 들로서 옥류천 제방 안쪽에 있었던 논들이다.
- 홍문들, 대문안들 : 옛날 남목에는 홍살문이 있었고, 이 홍살문 앞들을 홍문들이라 했다. 그리고 홍살문 안에 있는 들판을 '대문안들'이라 하였다. 지금의 한국프랜지 주변을 말한다.
- 돌안골, 목골새(沐谷沼), 물탕골 : 이 골짜기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라 하여 도 룡골(跳龍谷)이라 하였는데, 변음되어 돌안골이 되었다. 이 골짜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목골새라는 소(沼)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아래로 흘러 옥류천과 합류하였는 데 이곳이 물탕골이며, 여기서 미포동의 갯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지금의 동부 패 밀리 아파트 일대이다.
- 감남골(枾木谷) : 동부동의 가장 북쪽 골짜기로 옛날에 감나무가 많다 하여 감나 무골이라 했는데, 줄여서 '감남골'로 부르게 되었다.
- 숲안(林內) : 옛날 남목과 바다를 차단하기 위해 옥류천 제방에 미루나무를 빽빽 하게 심었는데 그 안쪽을 숲안이라 하였다.
- 층계돌, 도린작, 절골짝 : 감남골에서 동축사로 오르는 돌계단을 '충계돌'이라 하 며, 이 일대의 골짜기를 도린작이라 한다. 그리고 절 밑에 있는 약수터 일대를 '절골짝'이라 한다.
- 서당비알 : 서당이 있었던 산비탈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남목초등학교 근처다.
- 범밭재, 범굴골 : 호랑이가 출몰했던 고개라 하여 '범밭재'라 했는데, 주전·강동·어물리 사람들이 울산장을 오갈 때 이 길을 이용하였다. 이 근처의 골 짜기를 '범굴골'이라 했으며, 여기에 호랑이를 잡기 위한 포수막이 있었다.
- 두꺼비 바위(蟾岩) : 동축사 뒤에 육중하게 솟아있는 바위들 가운데 맨 위에 있 는 큰 바위가 두꺼비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는 남목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관일대(觀日臺)라고도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남목의 감목관이었던 원유영(元有永)이 쓴 '부상효채(扶桑曉彩)'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 기타 : 학다골, 쌍직골(雙直谷), 모번디기(묘지언덕), 몸밭골, 능구렁이골, 소직골, 음턱골, 악다(岳多)뻔디기, 검은 돌배이(黑端), 밤나무밭, 도둑놈모터 등이 있다.
주전동(朱田洞) 지명유래
주전동은 조선 정조 때 주전리와 주전해리(朱田海里) 두 개의 동으로 되어 있다가고종 31년(1894)에 주전동이 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인 1911년까지도 계속 주전동이라 하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다시 주전리가 되었다. '주전(朱田)'이란 땅의색깔이 붉다는 뜻인데, 실제로 이 마을 대부분의 땅색깔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자연부락
- 주전리와 주전해리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마을은 정조 때 주전리와 주전해 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금도 이 마을의 지형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해안을 따라 늘어선 마을과 산 아래의 언덕에 형성된 마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덕에 있는 '주전리'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해 왔으며, 바닷가의 '주전해리' 주민들은 주로 수산업에 종사하였다.
- 상마을 : 주전고개 넘어 동네 입구 첫번째 마을이다. 톳재이산 밑에 있는 마을 로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 중마을 : 주전초등학교 주변 마을이다.
- 아랫마을 :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어촌이었으나, 지금은 회촌이 되었다.
- 새마을 : 주전동에서 가장 늦게 형성된 마을이라서 '새마을'이라 부른다. 이곳은 바닷가의 검은 모래와 자갈이 깨끗하여 많은 피서객과 행락객들이 찾는 곳이다.
- 번덕 : 상마을 동북쪽의 산아래 있는 마을이다. '번덕'이 언덕이라는 뜻이니까 이 마을은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이 마을에는 대장간도 있었는데, 그곳을 '대장국'이라 불렀다. 지금 '어린이자연학습원' 일대가 이곳이다.
- 외짓거리(보밑 마을) : 봉수대 바로 밑(보밑)에 외딴 집이 있는 곳을 이렇게 불렀다. 지금은 횟집이 여러 곳 들어서 있다.
- 방령(坊嶺)마을 : 사방이 곽 막힌 성골에 있었던 마을이다. 물이 풍부해 농사가 잘 되었던 곳으로 옛날에는 부유한 마을이었다.
바닷가
- 큰불개안 : 아랫 마을의 해안으로 길이는 수백미터, 너비는 30m에 이른다. 이 해 안은 검은 자갈로 덮여 있어 특이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바닷가다. 이곳의 검은색 자갈은 성골천으로부터 떠내려온 것으로 백사장이 아닌 흑사장을 이루게 되었다. 이곳의 검은 돌을 찾아 수석 애호가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이 해안은 길고 넓은 큰벌 포구인데, 이것을 '큰불개안'이라 부르게 되었다.
- 후리개안 : 주전 입구의 백사장으로 후리를 하던 곳이다. '후리'란 그물을 양쪽 에서 끌어 당겨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 깜박덤 : 새마을 앞바다에 있는 바위로, 바닷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바위들이다.
- 듬벙개 : 아랫 마을 제당 주변의 바위들을 말한다. 바위들이 듬성듬성 널려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 동수돌(洞首岩) : 아랫마을 바닷가에 있는 큰 바위로, 여기서 채취된 미역을 마 을의 가장 나이 많은 어른에게 바쳤다 하여 '동수돌'이라 한다.
- 성지방(誠紙榜) : 아랫마을에 있는 제당(祭堂)으로 마을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제 사를 올리는 곳이라 하여 성지방이라 하였다. 해마다 3월 삼짇날 의식을 거행한다.
- 기타 : 웅굴암, 사을끝돌, 우출암, 미을수돌, 시리돌, 목출암, 디빈돌, 까거랑방, 청 돌, 낭나무돌, 강대돌(剛大岩=鹽左池器岩), 굴개안, 선돌, 노랑돌, 돔방 둥이 있다.
골짜기, 고개
- 삼밭골 : 주전 고개를 지나 동네 입구에 있는 양수장 일대를 '삼밭골'이라 하였다. 옛날 이곳에는 삼밭(痲田)이 많았다.
- 홈골 : 번덕 마을 동북쪽 골짜기로 여기에는 홈골못이 있다.
- 장지골 : 속등골과 성골 사이로 주전동에서는 가장 긴 골짜기이다.
- 새북골 : 장지골 서쪽의 좁은 골짜기로 이곳에서는 횐색의 진흙이 있었다. 옛날에는 이 진흙을 물에 타서 그을은 벽을 덧칠하는 데 사용하였다.
- 도문례(到門禮) : 성골 뒤의 주전과 새평 갈림산길을 말한다. 옛날 이곳 출신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다음 이 길을 통하여 금의환향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기타 : 큰골, 갓골, 장밭에, 실을바탕, 부엉이골, 오소리골, 속등골, 샘골, 갈밭골, 복사골, 보갓, 넘에, 갈바람뻔디기
개천과 들
- 홍골천(江谷川) : 사을들을 거쳐 바다로 흐른다. 지금은 '대장천'이라 부른다.
- 후리개안 : 주전 입구의 백사장으로 후리를 하던 곳이다. '후리'란 그물을 양쪽 에서 끌어 당겨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 성골천(城谷川) : 앞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성골은 마성이 있었던 마을인데 6·25 때 철거되었다. 이 마을에서부터 주전 앞바다로 흐르는 개천을 '성골천' 이라 한다. 이 개천을 현재는 '웅곡천'이라고도 하며 동구와 북구의 경계선 역할을 한다. 이 개천에서 흘러내린 돌이 바닷물에 씻겨 주전 바닷가의 검은 자갈밭을 이루고 있다.
- 사을들 : 번덕 마을과 홍골천 사이에 있는 들을 '사을들'이라 하는데, 『세조실록 (世祖實錄)」에 나오는 '사을'과 같은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기타 : 샛들, 웃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