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및 지명유래

전하1동 행정복지센터

history

  • 울산광역시 동구 전하 1동1997. 07. 15
  • 1988. 01. 01울산시 동구 전하 1동
  • 울산시 전하1ㆍ2동 분동1983. 10. 01
  • 1962. 06. 01울산시 방어진출장소 전하동
  • 1936. 07. 01울산군 방어진읍 전하리
  • 울산군 동면 전하리1910. 10. 01

전하동(田下洞) 지명유래

원래 전하동은 아름다운 포구로 둘안산 남쪽 바닷가의 작은 어촌이었다. 전하동에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 현종 13년(1672)으로 전하포(田下浦)라 하다가고종 31년(1894) 부터 전하동이라 하였다. 일제 시대인 1911년에도 전하동이라 하였고,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화정동 일부를 포함시켜 전하리라 하였다. 현재 전하동은 1,2동으로 다시 분동(分洞)되었으며 인구 밀도가 대단히 높다.

자연부락

  • 전하 마을 : 전하 마을은 그 말 뜻이 '밭 아래 마을'이다. 옛날 전하 마을에는 산 비탈에 밭이 많이 있었으며, 그 아래 바닷가로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논이 없 던 전하 마을 사람들은 대개 어업에 종사하였다.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던 이 마을을 이 지방 사람들은 '바드래'라 불렀다. '바드래'는 '밭아래(田下)'를 발음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다.
  • 녹수(綠水) : 전하동 동북쪽 둘안산의 능선과 포구에 자리잡고 있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이 마을 조금 북쪽에 있는 낙화암에 유람 왔던 처녀가 바다에 떨어져 익사하고 말았다. 얼마 후 이 죽은 처녀가 입고 있었던 녹색의 비단 저고리 소매만이 이곳으로 떠밀려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을 녹수금의(綠軸錦衣)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줄어 '녹수(綠抽)'가 되었다. 이 마을은 현대중공업이 들어서기 직전인 1970년 당시까지만 해도 67가구 250명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현대중공업의 1, 2도크가 있는 곳이다. 한편 녹수 마을과 전하 마을을 이어주던 둘안산에는 현대중공업 영빈관이 자리잡고 있다.
  • 명덕(明德)마을 : 바닷가에서 떨어진 산간 마을이었다. 농업을 위주로 하던 이 마을의 당산나무가 현재 현대중공업 본관 건물 앞에 있는 노송(老松)이다. 현대중공업 건설 당시 이 나무도 베어 버리려 했으나 정주영 회장의 만류로 남게 되었으며, 1년에 한번씩 신목제(神木祭)를 올리고 있다. 명덕을 혹은 '대편(大便)'이라고도 하는데, 밝고 편안하다는 뜻이다.

산-둘안산(頭龍山)

녹수 마을 남쪽의 산으로 해발 41m이다. 이 산은 해풍으로부터 녹수, 전하마을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 산 밑 바닷가로는 검은불, 사태밑, 듬벙개, 진바람, 고래개안 등의 이름을 가진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이 널려 있었다. 산등성이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동쪽 언덕의 잔디밭은 놀이터와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특히 정월 대보름날의 달집 태우기는 이 고장의 이름난 행사였다. 또한 이 산 밑의 바닷가는 해산물이 풍부했으며, 특히 미역이 유명하였다. 현재 이 산의 정상에는 현대중공업 영빈관이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잔디밭이 잘 가꾸어져 있다.

골짜기, 고개

  • 돌안골 : 지금의 울산대학교병원 바로 위에 있는 명덕 저수지 일대를 말한다. 이 골짜기로부터 시냇물이 발원하여 병원과 현대중공업 정문을 지나 바다로 흘러 들어갔는데, 이것을 명덕천이라 하였다.
  • 진성골 : 임진왜란 때 이 지방 의병들이 일본 침략군을 물리친 골짜기라 하여 '전승골(戰勝谷)'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진성골'이 되었다. 지금의 동부경찰서 일대를 말하며, 이 골짜기에 있었던 성을 '진성골 산성'이라 하였다.
  • 시리이재, 장터걸 : 진성골 산성 근처의 산길로 전하, 녹수, 명덕 마을 사람들이 울산장을 보러 다니던 고갯길이다. '시리'는 '시루'의 사투리이다. 그리고 이 길 을 시장 보러 다니던 길이라 하여 '장터길'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장터걸' 이 되었다.
  • 순국실(殉國室) :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병들의 영령을 모신 사당이 건립되었는 데, 이곳을 '순국실'이라 하였으며, '순구실'로 변음되었다. 명덕에 있는 농협 방어진 지점 앞을 말한다.
  • 범잔채골 : 다이아몬드 호텔 북쪽 골짜기로 범(호랑이)이 잔치를 벌인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바닷가

  • 목섬(項島) : 밀물 때는 섬이 되고 썰물 때는 육지와 연결되었던 곳이다. 이곳에 는 멸치잡이 후리막과 노송(老松)이 있어 그네뛰기를 하기도 했던 곳으로 지금의 현대중공업 제1도크 자리이다. 그리고 그 앞바다를 특별히 '목심바다(項深海)'라 하였으며, 이곳에 있었던 두꺼비 모양의 바위를 '두꺼비바위'라 하였다.
  • 기타 각종 바위들 : 돔바위(혹돔방), 근방, 일곱덩거리(일곱덩어리의 바위), 진줄 바위(긴 줄같이 늘어선 바위), 까치듬(까치를 닮은 세 바위), 달바위(평평하게 넓 은 달 모양의 바위)
  • 선사시대 고래뼈 발견지 . l996년 1-월 동구 전하동 동부경찰서 남방 100m지점 해안으로부터 약 250m 지점에서 발견된 고래뼈는 과거 방어진이 고래 잡이로 전국에 명성을 날리던 시절을 증명하는 귀중한 유물이 되고 있다. 부산대학교 지질학과 김항묵 교수로부터 3천년 전의 고래 유골이라는 학술적 고증을 거친 이 고래뼈는 흑색 점토층 지하 10m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 30m, 무게 30톤의 참고래 요골로 판명되었다. 동구청에서는 지역 문화 및 교육적 가치를 판단, 이 고래때를 민원실에 전시하고 있다.

미포동(尾浦洞) 지명유래

미포동은 조선 현종 13년(1672)에 독포(禿浦)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며, 영조 41년(1765)까지 이렇게 불려지다가, 정조 10년(1786)에 미포리가 되었다. 그후 고종 31년(1894)에 미포동이라 하였으며, 1911년에는 미포리로 다시 바뀌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동부동 일부 지역을 합하여 미포리가 되었다. 미포리는 19f2년 현대중공업 확장 공사로 모두 철거되어 동부동 새마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자연 마을로는 안 미포(內里), 바깥 미포(外里), 송전(松田), 한채(大鞭) 등이 있었으나 모두 현대중공업 내에 편입되었다.

  • 명자산(明紫山) : 미포동 북쪽의 산으로 명재(明嶺)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이 산에서 송이 버섯이 많이 채취되었다.
  • 동대(東臺) : 이 마을의 동산으로 500년 넘은 노송 일곱 그루가 있었으며, 이 가 운데 한 그루는 마을 당산목으로 중요시되었다.
  • 백산(白山) 명자산 아래에서 바깥 미포 쪽으로 뻗은 민둥산이다.

골짜기, 들

  • 미역골 : 서부파출소와 서부초등학교 사이로, 및날에는 이곳이 바다였다고 한다.
  • 활대골 : 명자산과 봉대산을 잇는 긴 골짜기가 마치 활같이 길게 휘어져 있다 하 여 붙여진 이름이다.
  • 당넘어 : 미포동에서 주전동으로 넘어가는 산길로 여기에는 돌무덤이 있었다.
  • 약물탕 : 봉수대 동북쪽 골짜기에 있었으며, 물맛이 그저 그만이었다고 한다.
  • 회나무들 : 한채 마을 앞 들판으로 옥류천(玉流川)이 흘렀다. 이 들의 입구에 거 대한 회나무가 있었고, 인근 주민들은 이 나무를 골매기신(고목나무신)으로 모시 며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빌었다.
  • 기타 : 안좌골(安坐谷), 구미널논, 장수대배기, 사근달(西陰), 매바위, 델개모티, 홈 탁골, 산소떼, 삼밭골, 재꼭대 둥이 있다.

  • 홍상도(紅裳島) : 미포 안마을 남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었다. 앞의 녹수마을 이름에 얽힌 전설에서 죽은 처녀의 녹색저고리는 녹수마을 앞 바다로 밀려가고, 붉은 치마는 이 섬으로 밀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붉을 '홍(紅)', 치마 '상(裳)' 자를 써서 '홍상도'라 하였다. 이 섬은 미포 사람들의 생활 터전으로 해산물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달집을 태우기도 했던 곳으로 동구 지역뿐 아니라 울산 지역에서도 손꼽히던 명소였다. 현재 이 섬은 현대중공업의 방파제가 되고 말았다.
  • 갈미섬 : 홍상도 서쪽에 있었던 배모양의 길게 생긴 섬으로 갈매기들의 보금자리 였다. 이 섬에는 혹돔, 감성돔, 우럭, 열기 등의 고기가 잘 잡혔으며, 우렁쉥이(멍 게) 채취로도 유명하였다.
  • 흘미섬(屹尾島) : 미포동과 주전동의 경계 지점에 있는 큰 바위섬으로 독도처럼 두 쪽으로 갈라져 있다. 이 섬 근처에서는 미역·소라·전복·해삼 등이 채취되고 감성돔, 게르치, 우럭, 볼락 등이 잘 잡혔다. 지금은 이 섬을 형제섬 혹은 혈미섬으로 부른다.

바닷가

  • 갯방, 갯방불 : 바깥 미포 입구의 바위들이 자연적인 방파제 역할을 했는데 이것 을 '갯방'이라 했다. '갯방'이란 '갯가의 방파제'를 줄인 말이다. 이 갯방 일대의 백사장을 '갯방불 '이라 하였다.
  • 넌불 : 미포 안마을에 있던 넓은 모랫별인데 유난히 모래가 곱고 반짝거렸다. 동 네 안마당처럼 사용하던 곳으로 '넓은 벌'이 ‘넌불'로 되었다. 여름밤에는 마을사람들의 잠자리가 되기도 하였다.
  • 낙화암 : 미포동 서쪽에 있었던 바위산이다. 바다 한 가운데로 돌출한 이곳은 경치가 매우 좋은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유람 왔으며, 여러가지 전설과 함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옛날 이곳에 놀러왔던 처녀가 떨어져 죽고 난 다음 입고 있었던 붉은 치마는 홍상도로 녹색저고리는 녹수로 떠내려 갔다는 전설은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 비둘기 똥지바위 : 미포동과 주전동 사이 바닷가 산에 있는 전망 좋은 곳이다. 이곳은 지형이 험하여 배를 타고 바다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바라보면 비둘기 배설물이 하얗게 쌓여 있어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 지경돌(地境石) : 미포동과 주전동을 구분짓는 동의 경계바위이다.
  • 기타 : 마당돌, 쿵키돌, 쌍두간, 옥기돌(삿갓바위), 금박돌(金箔石), 섬목아지, 김성 오돌, 붉은돌, 대패돌(새똥바위), 갈음내기, 큰연돌, 작은연돌, 석대(석두), 엉굴안, 죽음의 돌, 코앞에, 학구막살이, 노지섬(노적봉), 감불공동묘지, 큰감불, 작은감불, 첨성대바위, 포수막돌, 아들바위, 탕건돌, 띤바위, 북돌, 무등돌, 삿갓돌, 감불등떼, 몰랫개, 큰늘 ,작은늘, 펄덕돌, 외놈의 돌, 샛돌, 망성개안, 층계돌 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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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 2023-07-13